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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6] '혁명의 이행' 문턱 못 넘은, 스페인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6] '혁명의 이행' 문턱 못 넘은, 스페인 아나키즘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2.03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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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네그린
라크고 카발레로
루이스 아라키스타인
1937년 4월 카탈루냐 사회당(PSUC)과 반체제 마르크스주의 그룹(POUM) 간에는 충돌이 있었다. 사진=위키미디어

1937년 4월 말까지 CNT 지지자 사이에서는 공개적인 적대 행위가 있었다. 카탈루냐 사회당(PSUC - 카탈루냐의 사회주의당과 공산당의 통합) 당원과, 반체제 마르크스주의 그룹 POUM 간 충돌이 그것이었다. 5월 초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경찰이 CNT가 점령한 바르셀로나의 전화국 건물을 공격했다. 뒤이은 거리 전투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지식인 카밀로 베르네리(Camillo Bemeri)를 포함하여 400명이 사망했다. 

자신을 두루티의 친구라고 칭한 그룹은 CNT 지도부의 항복을 비판하고 선출된 위원회가 이끄는 혁명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경제위원회와 경제 문제를 처리하는 한편 전쟁을 관리하고 선전 및 국제적 질서를 감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이들은 '혁명을 감독할 유기체가 필요하고 조직적인 의미에서 적대적인 부문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청년연합Federación Ibérica de Juventudes Libertarias(FIJL)과 CNT의 지역 위원회는 이들의 주장에 반대했고 정부는 PSUC의 지원으로 아나키스트의 저항을 진압했다. 아나키스트에게는 엄격한 검열과 탄압이 가해졌다. 이는 카탈루냐에서 아나키즘 세력의 집권이 끝을 맞이했음을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CNT 사무총장, 군국주의 거부한 동지에 혼란의 책임을 묻다

후안 네그린 이 로페스는 스페인 정치가다. 1929년 사회당(PSOE)에 입당한 후 그는 1936년 9월 재무부장관이 되었다. 1937년 5월에는 마누엘 아사냐에 의해 135번째 총리가 되었다. 에스파냐 내전 도중 소련에게 금을 소련의 무기와 바꾸는 결정을 내렸고, 인민전선 정부가 스탈린의 지배에 넘어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진=위키미디어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갈등은 공화국 군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라르고 카발레로(Largo Caballero) 정부는 '노동절' 직후에 무너졌다. 이후에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후안 네그린(Juan Negrin) 정부가 들어섰고, 후안 정부는 바로 POUM을 불법이라 지정했다.

후안 네그린 정부는, 전쟁은 국가 권위의 집중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1938년 1월 확장 국가 경제 총회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이 대회에서는 근로 감독관, 근로 규범의 필요성이 수용됐다. CNT의 언론 검열은 대중의 의견 불일치를 방지하기 위해 승인되었다. 심지어 CNT, FM 및 FIJL의 집행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회의 직후 CNT는 UGT와 협정을 체결했으며, 이에 대해 사회주의 지도자 루이스 아라키스타인(Luis Araquistina)는 '바쿠닌과 마르크스가 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행되지 않았으며 적어도 바르셀로나의 아나키스트 주간지인 <Tierra y Libertad>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혁명적 대변동을 위한 ‘포옹’이었다. 그러나 권위와 자유, 국가와 아나키즘, 독재와 인민의 자유로운 연합은 인민의 자유로운 선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이해할 때까지 적대 관계로 남아있을 것이다." 

1938년 10월 CNT, FAI 및 FUL의 대표들이 참석한 전국대회에서 CNT의 사무총장은 처음부터 군국주의를 거부한 동지들이 현재 혼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운동은 분권화에 대한 믿음과 노동자 통제를 재확인했다. 프랑코의 승리는 곧 그들의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50만 명의 스페인인은 망명했다. 아나키스트 그룹은 망명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숙고한 ‘스페인 리버테리언운동’(Movimiento Libertario Espaliol)을 결성했다. 

 

EU라는 포스트 프랑코 스페인에서 혁명은 가능한가?

프랑코 사망 후, CNT는 1976년 스페인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적극적인 세력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새로운 CNT는 느슨한 신디카토 연합에 자니지 않았다. 사진=위키미디어

스페인 아나키스트 운동의 실패는 아나키즘 이론과 전술의 실패가 아니라 혁명 이행의 과정에서 실패한 것이다. 만일 후자가 전쟁 노력을 위해 희생되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프랑코가 사망한 후 CNT는 1976년 스페인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적극적인 세력으로 등장했지만, 이제 주요하게 행동을 하고 있는 단체는 사회주의자 UGT다. 새로운 CNT는 여전히 위원회, 무급 임원, 헌신적인 노동자들이 관리하는 느슨한 신디카토 연합이다. 

1936년 사라고사 대회의 프로그램은 공산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약속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수는 적지만 노련한 베테랑들은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경험을 전했다. 그들의 이상주의는 온전하다. 한동안 CNT는 다시 한번 노동운동에서 상당한 세력이 될 태세를 갖추는 것처럼 보였다. 불행하게도 이 운동은 1983년 제6차 전국대회 이후 두 분파로 나뉘었다. 즉 혁명적인 CNT-AIT(Asociacion Internacional de Trabajadores)와 개혁적인 CGT (ConfederationGeneral de Trabajadores)이다.  

이 날개들은 프랑코 국가가 압류한 연맹의 역사적 자산을 누가 소유하는지에 대한 분쟁에 잠겨 있다. CGT는 사회생태계에 합류했고, 이제 스스로를 리버테리언 사회와 '인간도 지구도 착취당하지 않는 미래'를 위해 투쟁하는 아나키즘적 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을 요구한다. 1970년대 초 포르투갈 혁명 동안 아나키스트 사상과 전술이 등장했다. 그러나 유럽 공동체에서와 같이 점점 더 확고히 자리 잡은 포스트 프랑코 스페인에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유럽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은 노동자 통제와 자기 관리를 위한 캠페인, 반문화, 평화와 녹색 운동, 반자본주의 및 반세계화 캠페인에서 그 주요 표현을 찾았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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