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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와 학문
급여와 학문
  • 최재목
  • 승인 2022.01.25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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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최재목 논설위원 /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논설위원

직장에서 계속해서 일을 하는 경우 그 대가로 일정한 돈을 정기적으로 받게 된다. 이것을 급여나 봉급, 급료나 보수라고 한다. 과거에는 국가로부터 받는 급여를 보통 녹(祿), 봉록(俸祿), 녹봉(祿俸)이라 했다. 

국공립이든 사립이든 대학 교수들은 봉급생활자로서 살아간다. 따라서 교수들은 각 대학이 정한 호봉 체계에 따라 급여를 받으며 생활하는 지식노동자이다. 연구, 교육, 사회봉사라는 책무를 지닌 교수들이 여타의 노동자들과 다르게 인식되는 것은 고등인재를 키우는 교육자라는 점에서이다.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 교수들은 주목과 존경을 받는다. 아마도 교수들이 전문 책무에만 오직 골몰하도록 사회가 암묵리에 지지해주는 것은 고등인재를 책임진 최전선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급을 전면에 내세워 학교 측과 협상, 투쟁하는 경우가 적다.  

내가 교수로서 살아온 세월 속에서 받은 허다한 질문이 “월급은 얼마쯤 받아요?”였다. 대학의 안과 밖에서 보통 교수의 권위나 가치는 돈의 액수로 판단된다. 대학 밖의 일반인들은 교수의 월급이 그들의 상상에 못 미친다고 생각할 경우 “교수도 별 것 아니네요”라며 의아해한다.

물론 같은 대학의 동료 간이나 다른 대학의 교수 사이에서도 급여 비교는 일상적이다. 심지어 지방대학에서 수도권으로 옮기려 했다가도 월급이 적어 단념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교수에게 급여는 대놓고 말하기 싫은, 민감한 문제이나 사실 마땅히 공론화할 사안임에 틀림없다.   

역대 정권은 교수의 봉급을 사회의 상위권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게 협력, 보호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지식인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최고 전문가인 교수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가능한 한 상호 갈등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기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수가 월급이 적어 연구와 교육에 집중할 수 없거나 3D업종으로 기피되어 이직률이 높아진다면 당연 국가사회의 지식기반은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이럴 경우 응당 인재양성의 천문학적 비용을 국가와 기업 등이 떠맡아야 한다.

결국 교수의 지위를 사회의 경제적 상위층으로 유지한다는 전략은 경제적 귀족(?) 만들기라는 세속적 발상이 아니라 국가사회의 지식기반 담당 전문가 만들기라는 공적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다. 

교수의 급여 문제는, ‘지식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할 당위성이 있다. 교수들이 다루는 지식은 개인적 기호물인가 아니면 사회적 공공재인가? 적어도 사회적으로 장려 혹은 금기시되는 지식이 있는 한, 교수들이 다루는 지식이 지극히 사적 기호에 기초해 있다 하더라도, 연구-교육-봉사라는 순환 고리 속에서 사유되는 공적인 것이다.   

사실 급여는 한 인간의 위상 나아가 인격을 말해준다. 돈이 그 액수만큼의 값을 명시하는 한 급여는 이미 사회적 가치 등급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신(神)이고, 월급쟁이들은 거기에 목줄을 맨 신도 아닌가. 이 시대의 성경은 인간이 욕망으로 써낸 자본이라는 문장이다. 사회의 도덕적 시선, 개인의 자존심이 그것을 애써 회피하게 하더라도 결국 급여의 수준은 한 인간의 현재적 가치나 등급을 말해주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제단(祭壇) 위에서 교수들의 ‘몸+값’을 논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도 금기시 할 사안도 아니다. 정당하게 토론할 의제이다. 급여는 교수 개개인의 권익과 복지의 민낯이고, 우리 시대 학문의 위상과 현실을 짚어주는 바로미터이다.

최재목 논설위원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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