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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제국과 실패국가
학살의 제국과 실패국가
  • 최승우
  • 승인 2022.01.24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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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영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372쪽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는 어디에서 기원했나?
이 책은 동학농민전쟁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일관계를 ‘학살’, ‘실패국가’, ‘민중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물이다. 천 년이 넘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언제나 좋았을 리 없지만 언제나 앙숙이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최근 한일관계는 경색을 넘어 냉동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동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할 한일관계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
우리는 흔히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 식민통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식민통치 이전에 일제가 저지른 조선인 학살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일제가 한반도에서 벌인 학살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한다. 제1차 학살이 동학농민전쟁(1894-1895), 제2차 학살이 정미의병전쟁(1907-1909), 마지막으로 ‘정신의 학살’이 벌어진 식민통치기이다.
제1차 학살인 동학농민전쟁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제국이 ‘학살의 제국’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됐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러 통계를 통해 1894년부터 약 50년간 일제가 한반도에서 벌인 학살의 규모를 최소 수만에서 최대 수십만으로 추정한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벌인 유대인 학살처럼 단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덜 알려졌지만 일제가 벌인 만행은 ‘학살의 제국’이라 불릴 만한 짓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개념이 더 등장한다. 바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실패국가’라는 것이다. 일제가 아무리 한반도를 유린하려 해도 조선과 대한제국이 튼튼한 국가였다면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은 19세기 말부터 자기 백성과 영토를 보호할 의지도 군사력도 없어 처음엔 청에 기댔다가 아관파천 이후엔 러시아에 기대는 등 국가는 존재만 할 뿐 사실상의 통치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저자는 앞서 말한 조선과 대한제국의 무능한 상태를 국제정치학 용어인 ‘실패국가’로 규정한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유명무실한 상태라 하더라도 한반도에 사는 민중까지 무력한 것은 아니었다.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이 외세에 대항한 것이 바로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일제 역시 한반도 침략의 가장 큰 걸림돌로 조선 민중을 지목했다. 그래서 민중의 저항을 뿌리 뽑기 위해 일제는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민중의 항일 의지는 정미의병전쟁으로 다시 한번 되살아났다. 이번엔 일제에 의해 해산된 군대까지 합세해 저항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일제는 한반도 내 항일 세력의 싹을 모두 자르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벌여 십여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학살했다. 그 결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때엔 일제에 저항할 세력이 일소되어 대한제국은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식민통치기 일본제국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3·1운동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 간도 학살, 간토대지진 시기 조선인 학살 등 육신의 학살은 물론이고, 단발령, 신사참배, 창씨개명,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 ‘정신의 학살’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의 기억이 한국인에게 강하게 남아 지금의 반일감정으로 분출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실패국가’ 조선·대한제국하고는 전혀 다른 대한민국에 살고 있듯이, 한반도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학살의 제국’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건설된 일본국과 다르다는 점이다. 저자는 간디의 “용서는 강한 자에게 주어진 특성”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과거에 사로잡힌 채 반일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강해져 건강한 민족정신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한일 간의 깊은 감정의 골을 메우고 양국 사이에 산적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일 양국은 피해자 혹은 가해자 프레임에서 벗어나 역사의 주체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침략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스스로 기른 힘으로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사는 민중의 역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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