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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31] 중년 남성들이 화를 많이 내는 이유
[한민의 문화등반 31] 중년 남성들이 화를 많이 내는 이유
  • 한민
  • 승인 2022.03.08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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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31

나이를 먹을수록 화나는 일이 많아진다. 나이 50이면 지천명이라던데 천명을 아는 건 이미 글러버린 듯하고 일단 정신건강과 대인관계를 위해서라도 감정을 좀 다스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화나는 이유야 많고 많지만 중년 남성이 화를 내는 이유는 의외로 섬세하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는 식의 감정을 억제하는 전통적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흔들림 없이 가정을 지켜야 하는 가장의 의무 등으로 중년 남성들은 감정에 서투르다.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은 고사하고 지금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특히 혼란, 공포, 불안, 슬픔 등 인정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면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화를 내 버린다. 화는 적어도 나를 약해보이게는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년 남성들이 화를 많이 내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 몰라서, 혹은 겁에 질려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화는 내도 문제, 안 내도 문제인데 아무데서 아무에게나 화를 내면 개저씨가 되고 화를 내지 않고 쌓아두면 병이 된다. 곧 화병이다. 

화병(火病, Hwa-Byung)은 한국의 문화적 증후군으로 ‘분노 증후군(anger syndrome)’으로 옮길 수 있으며, 증상에는 불면증, 피로, 공황, 곧 죽을 것 같은 공포, 불쾌한 정동, 소화불량, 거식증, 호흡곤란, 심계항진, 일반화된 통증, 상복부에 덩어리가 있는 느낌 등이 포함된다. 정신의학에서는 화병의 원인을 감정의 억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특히 분노를 발산하지 못하는 데서 화병이 발생한다고 본다. 

전문가들은 50대 남성들의 우울증 환자 수는 관련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펙셀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50대 남성들의 우울증 환자 수는 관련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다른 질병으로 입원한 50대 남성 환자들이 불면증과 답답함을 호소해 진료를 해보면 우울증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일하다가 잔소리가 많아지고 우울해지는 현상을 우울증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고 말한다.

아저씨들은 이런 상황을 방치하다가 병을 악화시킨다. 지금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모를뿐더러, ‘우울해서 병원을 간다’는 행위 자체를 남자로서 나약한 모습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불면증이나 두통, 소화불량 등 신체적 이상이 발생한 이후에야 병원을 찾는다. 원인을 몰라 내과, 가정의학과 등을 전전하면서 치료는 더 늦어진다.

이러한 현실이 내 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아저씨들은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알고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감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즐거우면 웃고 눈물이 나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익숙해지면 다음에는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안일 수도 있으며,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일 수도 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성장과정에서 겪은 과거의 상처, 사회적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자괴감, 마주하기 힘들어 기억 저편에 처박아둔 자신의 치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 성장을 저해하고 감정의 통제를 방해한다. 그러나 중년은 그러한 모습들 또한 자신의 일부이며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현실을 인정해야 그 현실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과거와 현재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최선을 다했지만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며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찰의 결과는 삶의 의미를 재설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부정적 감정의 실체들을 외면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꾸준히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에는 그것이 쉽지 않다. 지킬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의 지위, 나의 명성, 나의 재산. 내가 약해지면 나를 떠나갈 것들은 내 부정적인 면을 직면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긴 그게 쉬웠으면 화날 일도 없겠지 싶다. 별로 가진 게 없어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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