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7:45 (금)
두 철학자, ‘자유·혁명·폭력’을 논쟁하다
두 철학자, ‘자유·혁명·폭력’을 논쟁하다
  • 정세근
  • 승인 2022.03.16 0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가 말하다_『노자와 루소, 여든하나의 방』 정세근 지음 | 지식산업사 | 516쪽

노자 81장을 연극무대처럼 퍼포먼스 펼쳐 시각화
자연으로 돌아가고 놔두라는 교육학적 이상은 일치

2020년 『노자와 루소, 그 잔상들』(2020)이라는 책이 이미 시중에 나왔다. 그보다 먼저 쓴 『노자와 루소, 여든하나의 방』이 나중에 나왔다. 그전에 『노장철학과 현대사상』과 『도가철학과 위진현학』을 낸 적이 있는데 이를 나는 ‘쌍둥이 책’이라고 불렀다. 『노자와 루소』는 큰 제목에서 같으니 ‘동전의 양면’이다. 

 

여든하나는 ‘노자 81장’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책에는 노자 81장의 원전과 해설이 소상히 들어간다. 한 장마다 서너 절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니 『노자』를 알고 싶은 독자에게 우선 적당하다. 그것도 『노자』를 지은이가 혼자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루소를 등장시켜 문답식으로 대화시키고 있다. 가끔은 필자가 훈수꾼이라는 이름으로 끼어든다. 훈수꾼의 말은 최소화하려 했으나 노자도 루소도 못할 질문,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문제는 지은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노자』 81장을 놓고 노자, 루소, 훈수꾼 3인이 옥신각신하며 토론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일단 무겁지 않다. 

 

이 책에서 노자와 루소는 자유와 폭력 등에 대해 논쟁을 펼친다. 사진=위키백과

더 재밌는 것은 81장을 모두 연극무대처럼 꾸민 점이다. 그래서 방마다 다른 이름이 있고 색다른 무대장치도 있다. 막이 내릴 때마다 노자와 루소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그 장이 전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행위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제1막은 ‘검은방: 진리와 세계-그 길만이 길은 아니다’로, 제5막은 ‘짚으로 만든 개가 있는 방: 비움의 힘-어질지 마라’로, 제6막은 ‘계곡이 있는 방: 여성성의 찬미-모든 것이 모이는 골짜기’로, 제14막은 ‘노래방: 황홀의 세계-길을 열다’, 제31막은 ‘상복을 입은 방: 전쟁과 살인-승리를 슬퍼하라’로 꾸며져 있다. 

 

혁명을 위해 살인해도 되는 것일까

제31막의 경우, 루소는 나폴레옹의 군복으로 등장하지만 노자는 상복을 걸치고 나온다. 막이 내리기 전, 노자는 두루마기를 벗어 루소에게 주는데, 루소는 상복을 걸친 채 나폴레옹의 모자를 쓰고 퇴장한다. 루소는 노자에게 늘 시비조다.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노자가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군자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루소는 “죽일 때는 죽여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따진다. 노자는 발끈해서 “그대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추구가 폭력을 낳은 것을 아시오?”라고 반문한다. 루소가 “나는 자유를 절대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하자, 노자는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처럼 자유롭지 않은 시민은 사람이 아니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다시 묻는다. 루소가 “혁명이란 죽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서 “파리 판테온의 내 석관 문을 비집고 나온 횃불을 든 손 조각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자, 노자는 “승리를 기뻐하지 말고, 승리에 희생당한 사람을 위로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노자보다는 루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노자의 「덕경」 곧 제38막부터 읽는 것이 낫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홉스와 로크의 차이는 제57막)이 나오기 때문이다. 

 

루소는 노자 번역판을 읽었을까

이 책은 루소가 노자의 라틴어 번역판을 읽었다는 심증으로부터 시작했다. 개념은 너무도 많이 공유하면서도(예를 들어 소박·素樸·naiveté, 자화·自化·perfectibilité) 루소는 노자를 말하지 않는다. 정황상으로 볼테르는 『논어』를 인용하면서 예교주의자가 되고, 숙적이던 루소는 『노자』를 읽고 자연주의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루소가 죽고 10년 후 『노자가 영국왕립학회에서 발표(Matthew Raper, 1788년 1월 10일 )되고, 라틴어 번역본은 그전에 이미 동인도회사로부터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 루소는 어려서부터 사촌 아브라함과 목사 밑에서 라틴어를 배운 바 있다.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교육학적 이상은 노자와 루소가 일치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내버려 둬라, 잘 될 것이다! 부끄럽지만, 노자와 루소를 한꺼번에 알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아니면, 한 막씩 읽는 화장실 심심풀이로.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