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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3] "레닌이 죽었다. 자유 만세", 말라테스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3] "레닌이 죽었다. 자유 만세", 말라테스타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3.21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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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움베르토
맥킨리
말라테스타는 레닌이 사망했을 때 "레닌은 죽었다. 자유 만세!"라고 썼다. 사진=위키미디어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자 많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말라테스타는 새로운 정부가 러시아에서 '혁명을 굴복시키고 특정 정당의 목적에 복종시키기 위해 혁명 위에 세워졌다'고 비판했다. 

혁명은 정치적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변혁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이루어진다고 본 그는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레닌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해도 그는 러시아 혁명을 목 졸라 죽인 폭군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존경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다. 그는 죽었다. 레닌은 죽었다. 자유 만세!”라고 썼다. 아나키즘적 신념에 충실한 말라테스타는 의회의 모든 행동을 계속 거부했으며 상임 관리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한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920년 그는 사유 재산 및 정부 폐지와 함께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유로운 협회의 연합을 통해 사회생활을 조직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계 수단이 보장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애국적 편견'과 '종교와 모든 거짓말, 과학이라는 망토 아래 숨어 있는 허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가족은 재건되고 모든 법적 관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본 그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만인의 평등한 자유에 기초한 아나키즘적 이상의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해 설득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노동자의 처지 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정치투쟁, 즉 반정부 투쟁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부분적 자유를 위한 모든 투쟁은 지지할 가치가 있지만, 마지막 분석에서 투쟁은 반드시 물리적인 힘을 수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정부에 대한 억압의 유일한 한계는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힘뿐이고 성공적인 봉기는 인민해방의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시장을 몰수하고 모든 재화를 공유하며 그들의 삶을 스스로 조직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아나키스트의 임무라고 본 그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가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모두를 위한 복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연합 전선에서 좌파 세력을 결집시키려고 했다. 당이 집권하고 정부가 된다면 적과 맞설 것이라고 본 그는 항상 유연하고 새로운 동맹에 개방적이었다.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고 하며 “반대로, 우리는 사회적 진리는 고정되지 않았으며, 항상 좋고 보편적으로 적용되거나 미리 결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왕과 대통령의 암살자를 ‘영웅’으로 주장한 말라테스타

움베르토 왕. 사진=위키미디어

아나키스트들은 폭력에 반대하고 권력의 개입 없는 사회를 추구했지만, 말라테스타는 폭력은 폭력으로부터 자신과 타인을 방어하기 위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반복했다. 폭력은 그 자체로서는 악이지만, 특권계급이 자발적으로 지위를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혁명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강제로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해 대항해야 한다고 보았다. 폭력은 해방의 순간이 도래하는 즉시 중단되어야 하는 불쾌한 필연성이라고 본 그는 움베르토 왕과 맥킨리 대통령의 암살을 비난하기를 거부했으며 암살자들이 '성인'이자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는 혁명가로서의 '행위에 의한 선전'과 톨스토이의 '수동적 아나키' 사이의 중간을 택했다. 사회생활은 타인과 화해할 수 없는 욕망을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원래 조화롭지 못하고 절대적인 자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말라테스타는 자유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힘으로 주장하면서, 사회적 자유를 '모두에게 평등한 자유, 오로지 불가피한 자연적 필요와 타인의 평등한 자유에 의해 부과되는 제한과 함께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건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소수자에게 법률을 부과할 다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에 반대하며 차이는 상호 합의와 타협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류를 연결하는 자연적 연대에 기초해서만 가능한 체계가 코뮤니즘이고 모든 사람의 이익과 모든 사람이 가능한 최대의 복지와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사회의 기반이 된다고 봤다.

그는 인간의 고통을 증가시키고 평등한 자유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범죄가 정부와 사유 재산이 폐지되면 중단되지만 사회적 원인이 제거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줄어들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사회의 사람들은 범죄자와 비행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그들을 '방황하는 형제, 사랑이 필요한 병자'로 취급할 것이지만 국민의 일시적인 폭력조차도 사법부와 경찰의 합법화된 국가 폭력보다 항상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1919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아나키즘이 크게 부흥했고 그것은 말라테스타에게도 가장 활동적이고 성취감 넘치는 시기가 되었다. 혁명적인 유니오티 신다칼레(Uniotie Sindacale)는 그 활력을 되찾았고 약 40만 명의 회원을 거느렸다. 말라테스타는 노동자들의 혁명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나키스트로서 노동조합 내에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일할 것을 촉구했다. 1920년 3월, 그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뿐만 아니라 공장을 인수할 것을 촉구하는 <신인류>(Umanitis Nova)지를 창간했다. 

광범위한 동요 후에 금속 노동자들은 밀라노와 토리노의 작업장을 점령하고 방어를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고 조직했으며 다른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공장과 토지를 점거했다. 그래서 혁명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14년의 패턴은 반복되었다. 사회당과 노동총연맹(Confederazione Generale del Lavoro)은 이탈리아에 원자재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혁명행동을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정부와 함께 노동자 통제의 상징적인 형태를 취했고 노동자들은 직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에 순종했다. 봉기로 이어지지 않은 총파업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말라테스타의 견해를 확인시켰다. 

 

1922년 무솔리니의 행진…1926년 말라테스타의 <생각과 의지>

말라테스타. 사진=위키미디어

파업에 참여했던 말라테스타와 80여 명의 아나키스트들은 10월에 체포되었다.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감옥에서 배심원단에 의해 석방된 이듬해 7월까지 이들은 수감되었다. 그 뒤 말라테스타는 노동자 동맹을 통해 파시즘에 대항하는 아나키 세력을 통합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는 노동계급 운동이 당시 사회변혁을 위한 가장 강력한 힘임을 인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은 분파적 이익에 봉사하고 기업 정신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개량주의적인 경향이 있지만, 혁명적 상황에서는 가치가 있을 수 있었다. 말라테스타는 노동자 조직을 미래 사회의 유일한 틀로 본 생디칼리스트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주창한 총파업은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강력한 무기일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혁명적 대의에 해를 끼칠 수 있었다. 

혁명에서는 노동자 조직이 사라지고 새로운 대중 집단에 흡수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스트들에게 노조 내에서 아나키스트로 일하면서 가능한 한 직접행동, 분권화 및 개인 주도권을 옹호하고 실천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개인에게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허용해야 하는 아나키즘을 포기해야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또한, 총회의 결정은 구속력이 없어야 하며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한 제안일 뿐이라고 했다. 동시에 아나키 조직은 구성원들 사이에 '정신적 친화력'을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구성을 조정하는 한 단결해야 했다. 공장점거와 총파업이 무너지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21년에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밀라노에서 일련의 폭탄 테러를 감행하여 많은 노동자들을 소외시켰을 뿐만 아니라 파시스트들에게 좌파에 대항하여 반폭력을 사용할 구실을 제공했다. 마비된 사회당은 세 개의 다른 파벌로 분열되었다. 

 

폭력적 혁명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말라테스타

무솔리니의 로마 행진. 사진=위키미디어

1922년 무솔리니의 로마 행진은 이탈리아 노동계급 운동의 패배를 예고했다. 끊임없는 경찰의 괴롭힘과 정부의 검열에도 말라테스타는 i924년부터 1926년까지 그의 가장 사려 깊고 날카로운 관점이 포함된 <생각과 의지>(Pensiero e Volontiz)를 발간했다. 뒤에 그는 아나키즘은 어떤 철학적 체계와도 연결되지 않고 '사회적 불의에 대한 도덕적 반란'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학파로 분열된 아나키스트들의 공통점을 '보다 안전한 자유 보장 추구'라고 본 그는 자유롭게 수용된 코뮤니즘이 개인의 자유를 위한 최선의 보장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결속을 통해서만 '자연의 적대적인 세력'을 극복할 수 있대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과 대조되는 의지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에게 과학이 제공하는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자연질서 개념, 즉 이전의 아나키스트 철학의 기반을 형성했으며 습관적으로 정부의 인위적인 무질서와 상쇄되어 온 것을 거부한 최초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이다. 그는 폭력적인 혁명만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의지의 행위이지 경제적, 정치적 힘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고 믿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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