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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서 비극적 선택을 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캠퍼스에서 비극적 선택을 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 박건우
  • 승인 2022.05.04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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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박건우 서울대 보건대학원 박사수료
박건우 서울대 보건대학원 박사수료

보건학, 그중에서도 통계와 역학을 바탕으로 연구하는 나에게 숫자는 매일 마주하는 연구 재료다. 보건학자들은 보통 평균과 분산 그리고 선형방정식의 형태로 출생과 질병, 사고와 장애 그리고 죽음을 다룬다. 숫자로 표현되는 인생의 순간들 안에서 연관성을 찾고, 궁극적으로 인과관계를 밝히는 작업을 지난 수년 동안 진행했다. 양적 연구를 업으로 삼는 다른 사회과학자나 의학자들처럼 나도 처음에는 p값(probability value)에 집착하고, 사례 수에 미련을 가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빅데이터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런 집착과 미련은 어쩌면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자살’이다. 무겁고 우울한 주제이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주제이다. 연구가 마음처럼 진행되지 않을 때면 가끔 ‘나는 어쩌다가 자살을 주제로 선택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 끝에는 항상 2011년 4월이 있다. 그해 봄, 카이스트(KAIST) 대전 캠퍼스에는 벚꽃 대신 이상하게 습한 기운이 감돌았다. 소중한 사람들을 연속해서 자살로 잃었던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때 느꼈던 좌절감과 분노는 내가 자살 연구를 놓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단순히 숫자나 수사학으로만 자살 문제를 다루지 않게 된 계기이다.

최근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선생님들과 만나 청년 자살의 증가에 대한 현황과 진단을 담은 『가장 외로운 선택』이라는 책을 썼다. 다양한 자료와 임상 경험 등에 기초해서 무엇이 청년을 스스로 죽음으로 내모는지 분석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 선생님과 토론하고 느낀 점이 있다. 첫 번째는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이 절망에 빠지는 원인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피상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청년 세대를 정치와 마케팅에 이용‘만’ 한다. 두 번째는 우리 사회는 자살 문제를 너무나 쉽게 개인적인 것으로 치환해버린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우울증 병력이나 유서 내용으로 자살의 원인을 단순화할 수 없다. 자살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얼마 전 내가 몸담는 학교에서 대학원생 학우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을 보도하는 기사는 유서에 기반하여 죽음의 원인을 단정 지었다. 이 소식을 다루는 온라인 게시판은 출신 대학의 서열을 나누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내가 10년에 보았던 장면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청년의 비극적 죽음을 다루면서 자살 보도 권고기준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보도와 온라인상의 차별과 혐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들이 있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기에 앞서 학교 당국 혹은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같은 기관에서 도움을 받았는지? 팬데믹 동안 학교 당국은 정신건강 증진과 자살 예방을 위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살 행동에 앞서 여러 가지 신호를 지인, 친구 혹은 동료들에게 보냈을 텐데 그중에서 자살 예방 교육을 받았던 사람은 있었는지? 기숙사에서 지냈다면 코로나19가 유행하는 동안 어떤 심리적인 지원을 받았는지? 누구도 제대로 묻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죽음은 안타깝게 자살사망률이라는 숫자에 반영되었을 뿐이다.

청년들의 정신건강이 위태롭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이는 적어도 고소득국가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학교라는 물리적·정서적 공간이 중요하다. 학교는 제대로 설계되고 집행되는 예방 전략을 가지고 건강증진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곳이다. 동시에 사회적 연대에 기초한 지역사회의 역할도 할 수 있다.

아직 속단하기 힘들지만, 감염병이 바꾼 삶의 궤적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캠퍼스도 다시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이제 학교라는 공간을 다시 생각할 시간이다. 단순히 배우는 곳 혹은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곳으로 바꾸어야 한다. 건강증진 프로그램만 제공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건강한 문화가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학교라는 공간을 바꿀 수 있다면 사회도 바꿀 수 있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그런 사회로.

 

박건우 서울대 보건대학원 박사수료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생명과학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사회학과 역학을 공부했다. 연구하는 주제는 정신질환과 자살 행동의 역학적 특성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사회 현상이다. 통계 결과표를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지만, 숫자 이면의 사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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