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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불행한 최고 통치자…‘동양적 전제주의’는 착각
임금은 불행한 최고 통치자…‘동양적 전제주의’는 착각
  • 김재호
  • 승인 2022.05.10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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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③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달 16일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가 「유학에서의 자유와 공동체」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4강은 나종석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철학)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제5강은 이진우 포항공대 명예교수(철학)의 「인간 자유의 본질」, 제6강은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의 「자유, 다원주의, 상대주의」, 제7강은 김현섭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자유와 정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동양은 전제 군주 1인이 지배했다는 시각은 19세기 제국주의의 야만
임금이 내린 정령·조칙도 사실에 입각해 타당성 입증 후 군명으로 수용

무위 정치는 유가와 도가를 막론하고 고대 동양에서 이상으로 여기던 정치 형태였다. 명·청 시대의 황궁인 자금성 교태전(交泰殿)의 중앙에는 ‘무위’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다. 유교가 지배적인 정치이념으로 군림하던 이 시기에도 무위는 변함없이 좋은 정치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백성들은 국가 권력이 지배하려 할 때보다 지배하지 않을 때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건강하게 꾸려갈 수 있고, 통치자가 백성들의 삶을 간섭하거나 지배하지 않을 때 오히려 좋은 임금이라고 칭송받는 정치 형태가 바로 무위 정치이다. 무위는 ‘통치의 부재’라기보다 ‘자의적인 지배의 부재’를 뜻한다. 공자는 무위 정치를 행했던 비지배적 리더십의 표본으로 순임금을 든다.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조선의 왕들이 전제주의적 정치를 펴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동양은 변덕스러운 전제 군주 1인에 의해 지배되었던 낙후되고 정체된 사회라는 시각은 19세기 제국주의 시기 이래 유럽 중심주의자들이 공유해온 믿음으로, 이들 눈에 비친 동양은 이성·문명·진보의 상징이던 유럽의 대척점에 타자(other)로 설정된 야만의 표징이었다. 전제 군주 1인에 의한 자의적이고 폭압적인 지배 체제를 의미하는 동양적 전제주의의 이미지는 실제 역사 속에서 구현되었던 유교 사회의 모습, 특히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의 실제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유교 조선에서 통치 권력의 자의적 남용을 막고 백성들의 자율적 삶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원리와 제도적 장치는 크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종성헌(祖宗成憲) 및 『경국대전』·『국조오례의』·『주례』 등의 법전과 예전. 둘째,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원리와 재상 제도. 셋째, 경연(經筵)과 대간(臺諫) 제도. 넷째, 반정(反正)에 의한 국왕 교체. 

조종성헌이란 선왕들이 세운 헌법적 규범을 말한다. ‘조종성헌’이 통치권자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견제하는 최종 심급으로 항상 ‘무제한적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쟁점이 되는 사안에 따라 국왕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강행하려는 정책 결정의 근거를 ‘조종성헌’에 귀속시키기도 하고, 이에 반대하는 대신들은 다시 ‘조종성헌’을 뛰어넘는 상급심으로 ‘예’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 한 예로, 연산군은 즉위하던 해에 고인이 된 성종의 넋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고자 하였다. 이에 신료들이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자 국왕은 이미 선대에도 시행했던 전례가 있는 ‘조종성헌’이라고 강변하면서 자기 의사를 굽히려들지 않았다. 이에 강백진·이의손 등이 상소를 올려 “예(禮)에 벗어나는 일은 결코 ‘성헌’으로 여길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국왕의 결정에 반대를 제기하였다.

‘경(經)’은 왕도 정치의 핵심 이념과 역사적 사례가 담겨 있는 유교 경전을 의미하고 ‘연(筵)’은 대자리로 만든 좌석을 의미한다. 즉 경연은 군주의 경전 공부를 위해 설치된 학습의 장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군주는 50세 될 때까지 공부를 마치면 자립하여 통치자가 될 수 있었지만, 조선의 군주는 재위하는 동안 평생에 걸쳐 경연관으로부터 강의와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조선에서는 연산·광해와 같은 몇몇 폭군을 제외하고는 군주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군주의 보위에 재임하는 동안에는 경연에 참석하여 정치철학 강의와 훈계를 들어야했고, 대간으로부터 수시로 규간과 봉박에 시달려야 했던 “불행한 최고 통치자”였다.

정도전은 통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보상(輔相)과 대간(臺諫)이라는 두 제도를 구상했다. ‘보상’은 현능한 재상이 통치권자를 보좌해서 국정을 총괄해서 관리한다는 의미이고, ‘대간’은 통치권자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통해 자의적 권력 행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미이다. 정도전은 새로 건국하는 나라에서 재상이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논한 후에, 이어서 대간의 중요성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대간이라는 직명에서 ‘대’는 사헌대(司憲臺 또는 司憲府)로서 고위 관리들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기구를 가리키고, ‘간’은 사간원(司諫院)으로서 국왕을 ‘규찰’하고 ‘봉박’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기구를 말한다. 규찰(糾察)이란 임금이 내린 정령을 사실 관계에 입각해서 조사하여 규명하는 일이고 봉박(封駁)이란 임금의 옳지 않은 조칙(詔勅)을 그대로 봉해서 돌려보내는 일을 말한다. 아무리 임금이 내린 정령과 조칙이라 해도 사실성에 입각해서 그 타당성과 정당성이 입증된 후에야 군명(君命)으로 받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입헌주의를 구성하는 제반 원리 가운데 핵심이 되는 요소는 통치권력의 무제한적 확대와 자의적 권력 행사를 견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입헌주의의 이러한 핵심 이념은 유교 사회에서 통치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방지하고 백성들의 자율적 삶을 보장하기 위해 추구했던 ‘비지배적 자유’의 지향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법과 제도가 사려 깊고 현명한 관리자를 기다리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는 순기능을 배가시켜줄 수 있는 에토스(기풍)를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적 입헌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와 시민적 덕성이 필요하다. 입헌주의의 에토스는 단시간에 배양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에토스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권위 있는 전통과 관행, 보편적 도의와 원리를 추구하려는 열정, 실행(praxis)을 통한 시민적 덕성의 함양 등을 통해 구성원 모두에게 마음의 습속으로 형성될 때 비로소 공기처럼 사회 전반에 배어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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