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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
  • 최승우
  • 승인 2022.05.20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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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이숭희 엮음 | 352쪽 | 푸른사상사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에 온몸으로 부딪쳤으나 끝내 역사에 묻혀 잊혀진 한 청년의 기록

격변하는 한국 현대사 속으로 사라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청년 ‘김건후’의 삶과 흔적을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김재원·이숭희 엮음)에서 파헤친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몸 바친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미국 유학을 거쳐 소련의 스탈린 대숙청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어느 한국인 청년의 비극적인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김건후가 한국전쟁 시기 납북된 뒤에 태어난 딸인 김재원 교수는 어머니인 정정식 교수로부터 전해진 기억, KGB(옛 소련 비밀경찰)와 미국 국립문서고(NARA II) 등에 보관되어있는 기밀문서와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그의 행적을 추적해나갔다. 특히 소련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김건후의 친필 수기는 참혹한 소련 강제수용소 생활을 잘 알려주는 가장 생생하며 방대하고 진귀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김건후의 생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한 독립운동가 김홍서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난 김건후(金鍵厚)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여 칭치엔허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다. 미국으로 유학한 뒤에는 허버트 김(Herbert Kim)이라는 이름으로 광산학을 전공하였으며, 대공황으로 인해 소련으로 이주하여 광산기술자로서 활동하다가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고, 강제수용소에서 노역에 동원된다. 그가 겪은 재판 과정과 수용소에서의 혹독한 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친필수기를 통해 시베리아 굴락의 비인간적인 환경과 인권 유린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극심한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공산주의에 동조적이라는 의심을 받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었지만, 자신의 전공을 살려 광산 개발에 매진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여전히 생사도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가졌던 여러 이름은, 기구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역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격동의 시대, 개인의 비극이 던지는 시사점
김건후가 겪어야 했던 역경과 불행은 조국을 잃은 한 지식인이 짊어져야 했던 모진 운명이었다. 그가 거쳐온 파란만장한 삶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곧 당시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거쳐온 격동의 시대를 반영한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망명, 미국의 대공황과 미·소 간의 정치 대립, 스탈린의 대숙청, 이념투쟁의 장이었던 해방기의 한국. 극심한 시대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삶과 행적을 들여다본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참혹했던 역사의 비극을 되새기고 반성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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