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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과 탈주자학의 대립을 넘어…조선 후기 담론장 다시 읽기
주자학과 탈주자학의 대립을 넘어…조선 후기 담론장 다시 읽기
  • 이송희
  • 승인 2022.06.0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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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⑫ ‘성리학적 억압’이란 무엇인가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조선의 성리학에 근대화 실패의 책임을 돌리는 
소위 ‘내재적 발전론’의 서사도,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도 
모두 조선의 성리학을 납작하고 단일한 억압기제로 전제해왔다. 
하지만 조선의 ‘도덕적 선전 작업’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가져오는 것 이상의 복잡한 결과를 초래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을 윤리주체로 호명하는 일은 
의도치 않게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다양한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조선 후기 ‘성리학적 억압’의 존재는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교조화된 성리학의 영향이 조선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규율했고, 종법의 강화와 명분론에 대한 집착이 시대착오적 국제인식이나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가중했다는 서사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당연시되고는 한다.

하지만 성리학의 ‘교조화’란 정확히 어떤 현상을 가리키는 것일까? 주희의 학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경직된 사상적 분위기를 일컫는 것이라면, 권력과 가까이 있던 소수의 학자-관료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문난적 논쟁이 전사회적인 충효열의 실천이나 장자우대상속제의 강화 현상을 불러왔다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혹은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종종 ‘공리공담’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세계와 인간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철학인 성리학이 유독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자결이나 신체훼손에 이르는 효(孝)와 열(烈)의 극단적인 실천을 불러일으킨 원인으로 지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은 의외로 자주 생략된다. 이는 물론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의 성리학이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따라서 오랜기간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어 왔기 때문이다. 조선 한문학사를 근대로의 노정으로 서사화하려는 과거의 열망은 주자학의 안티테제로서 양명학이나 실학을 소환하거나, 조선 후기의 문학적 현상들에서 개인의 내면이나 근대적 도시의 풍경들, 혹은 탈중세적 소설(novel)로의 진화를 발견하려는 목적론적 해석을 낳았다.

성리학적 억압이 조선 후기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포획했으며 이로 인해 이 땅의 근대화가 지연되었다는 고전적인 관점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과거에서 반-주자학적이거나 탈-주자학적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의 덫에 빠트리고는 했다. 이는 성리학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나 명분이 등장하는 문헌을 ‘주자학’이라는 거친 범주로 분류해버리고, 반대로 우리가 상상하는 억압적인 성리학의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무언가가 돌출하면 이를 ‘탈주자학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단순한 접근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정작 조선 성리학자들의 학문적·실천적 관심사나 ‘성리학적 억압’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묻는 작업은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졌다.

90년대 이후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대대적인 반성의 물결과 함께 조선 후기 사회에서 근대의 맹아를 발견하고자 했던 연구 경향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작업이 이루어졌으나, 근대적인 무엇으로 이해되던 조선 후기의 여러 현상들에 도로 ‘성리학적’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만으로 잘못된 이해가 교정되었다는 듯 여기는 학문적 관행은 유감스럽게도 여전하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나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같은 조선 문인들이 실제로 실학자나 양명학자라기 보다는 주자학자였다는 지적을 하는 것만으로 모든 설명이 이루어진 듯 간주하는 태도에 의문을 품는 데서 나의 본격적인 문제의식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주자학은 고정된 객체일 수 없다

송대 성리학이 단순히 주희라는 한 사상가의 사상과 학문이 아니라 주희 당대와 후대의 여러 학설이 경합하며 역동하는 장(場)이었듯이, 조선의 성리학 역시 송대 성리학에서 유래한 몇 가지 성리서(性理書)와 이론들로 수렴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왕 이하 모든 정치가-관료가 성리학자임을 자임했던 조선 사회에서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하였으며 무엇을 성취하고자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자신의 지식 및 언어자원을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고 활용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 박사 논문에서 나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언어가 정치 수사화(修辭化)하는 양상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자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사단칠정논쟁과 호락논쟁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성리학은 마음(心)의 윤리적 위상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율곡학파의 경우 퇴계학파와의 치열한 경쟁 과정에서 마음에 행위주체로서의 위상을 부여하고, 개별자의 윤리적 행위역량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모든 인간이 선한 본성을 실현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은 성리학의 기본 전제이지만,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는 순선한 리(理)가 아닌 청탁수박(淸濁粹駁)의 기(氣)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성리학자들은 타고난 기질적 한계로 인하여 범인의 도덕적 성취는 도달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특히 수양을 위한 물적 여건을 갖추지 못한 사대부 남성 외의 존재들은 더더욱 그러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기질이 지극히 탁박한 자라도 선한 정(情)을 발현할 수 있다는 18세기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주장은 무작위적으로 타고나는 기질의 고하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노론-낙론계 성리설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윤리적 역량은 정치적 역량과 동일시된다. 바꿔말해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관한 성리학의 도덕철학적 언어들은 정치명분을 획득하기 위한 수사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곤 했다. 대표적으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대명의리라는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성취가 곧 중화 문명의 자격이라는 인식 아래 충효열의 실천 사례를 칭송하는 글을 대량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는 여성이나 평민의 전기도 적지 않다. 

충효열의 실천이 신분질서 흔들 수도

내가 주목한 지점은 이러한 ‘도덕적 선전 작업’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가져오는 것 이상의 복잡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을 윤리주체로 호명하는 일은 의도치 않게 사회적 신분을 교란하는 다양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얼과 중인 통청운동에서는 18세기 말부터 자신들을 임금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한 해바라기에 비유한다. 유교적 충(忠)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말은 곧 그가 관직에 나갈 자격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서얼통청운동자료인 『규사』는 서얼 또한 군주를 향한 충을 실천할 수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실제로 교조적 주자주의자라고 간주되어 온 노론이 오히려 여성 교육에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노론 내에서도 윤리적 실천역량의 보편성을 확대해 나간 낙론계에서 유독 여성 성리학자로 불리는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이 출현한 현상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성을 열(烈)의 실천주체로 호명하는 도덕언어는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윤리적 역량을 지닌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두지 않는다는 오랜 유비에 따라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는 임금을 위해 죽은 충신과 동일한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개혁적 실학자로 분류되어 온 남인들이 오히려 강상윤리나 신분질서를 보다 철저히 고수하고자 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충신과 열녀는 다르다”고 딱 잘라 말하며 여성의 교육에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약용은 명예와 이득을 구하는 이들이 효자와 열녀 정표 정책을 그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들이 노론에 비해 특별히 성차별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노론, 특히 낙론계 성리학자들이 여성이나 평민의 때로는 과도하기까지 한 도덕 실천을 높이 평가하는 현상은 권력을 쥔 자의 여유로 보이기도 한다. 반면, 이익 계열의 남인들은 주어진 자리에서의 책임을 넘어서는 과도한 도덕 실천이 사회 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경계했던 듯하다. 

이처럼 조선 후기 성리설의 전개와 그 도덕적 언어들이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추적하면 억압적인 성리학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진다. 동시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 성리학의 상이 얼마나 납작했던 것인지, 또 조선 후기를 그 담론장 내부에서 설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이전에 너무나 쉽게 ‘교조적’ 혹은 ‘탈성리학적’이라고 손쉽게 단정 지어왔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게 된다. 

발전론과 단절론을 넘어서

조선 후기 담론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그 결을 하나하나 추적해 내려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19세기 말, 근대의 충격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양적으로만 보면 현재 남아 있는 한문 문헌의 상당수는 20세기 초반에 출간된 자료이다. 이 자료들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연구자들의 관심 밖에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직전 시대에 통용되던 언어와 이 시기의 자료를 나란히 비교해보면 여러 흥미로운 현상들이 발견된다. 

여성과 충(忠)의 사례를 다시 들어 보자. 박씨전과 같이 여성의 무용담을 그린 여성영웅소설들은 조선에서 18~19세기에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20세기에 간행된 판본들에 이르러 이들 여성들은 ‘충신’으로 뚜렷하게 명명되기 시작한다. 이는 물론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을 ‘국민’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했던 근대적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남녀의 역할이 분명히 구획되어 있던 사회에서 여성이 ‘충신’으로 호명되는 것을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조선 후기에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적 가치에 헌신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 않았다면 여성을 국가에 헌신할 애국의 주체로 호명하기 위한 기획은 보다 복잡한 경로를 밟아야 했을 것이다. 

1906년 <대한일보>에 연재된 신소설 여영웅 역시 조선 후기 여성영웅소설의 서사와 문체를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중간중간 남녀동권론 등의 내용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 또한 발전론이나 혹은 단절론의 논리만으로는 이 땅에서 근대적 국민국가가 탄생한 과정을 적실히 설명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조선의 성리학과 도덕·정치 담론의 전개는 물론 근대로의 노정이 아니었으나, 어느 날 들이닥친 근대사상의 세례에 주자학이 수동적이거나 방어적으로만 반응한 것 또한 아니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모든 새로운 지식과 사유체계는 조선의 언어장을 경유하여 수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존 담론 자원을 통한 재조직화는 필연적이었다. 다시 말해, 근대 전환기는 수백 년에 걸쳐 구성된 조선의 언어장이 불과 수십 년 만에 대대적으로 재배치되던 시기였고 그 와중에 유럽에서 기원한 근대 지식도, 주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의 성리학도 마구 뒤섞이고 굴절되며 경합했을 것이다. 그때를 살아간 사람들은 과연 어떤 언어를 골라 격변기에 대응하고자 했을까? 그것이 사문(死文)을 연구하는 한문학자로서 내가 동료 연구자들과 만나고 싶은 주제이다.

이송희 고려대 한국언어문화학술확산연구소 연구교수
1988년생. 2021년 고려대 국문과에서 「노론-낙론계 윤리주체의 형성과 전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 성리설과 대명의리, 충역시비 등의 언어적 맥락을 추적하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최근 발표한 주요 논문으로는 「金昌協의 윤리 주체와 誠意論–「四端七情說」과 「自欺說」을 중심으로」, 「김응하 충렬록(忠烈錄) 판본 변개 과정과 그 의미」, 「『家政』 계열 齊家書 연구 - 奎章閣本 『家政』 및 『家政野談』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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