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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람 중사’ 자살…여성은 열등하고 부정한 존재일까
‘이예람 중사’ 자살…여성은 열등하고 부정한 존재일까
  • 유무수
  • 승인 2022.06.1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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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우리 안의 나쁜 여자』 권오숙 외 9인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384쪽

남성이 정한 규칙에 어긋나면 나쁜 여자로 규정
신화·철학·마녀사냥에서 발견되는 여성 비하의 계보

가부장제의 독선적인 유령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여전히 역동적으로 떠돌고 있다. 1988년생 이예람 중사는 5년간 근무한 공군생활을 자살로 마감했다(<주간조선> 2022년 5월 27일, 「故 이예람 중사 4일의 비극... 1년 만에 뜬 특검이 밝혀야 할 것들」). 회식자리에서 남성 상관의 성추행이 있었고 이 중사는 성추행 사실을 신고했지만 부대 권력자들의 명령은 잠잠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주체가 되고 자기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천부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합리적인 문제제기는 억압됐고, 오로지 튀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불합리한 회유와 협박이 계속됐다. 가부장적 문화에 찌든 남성 상관들은 이 중사를 ‘걸핏하면 신고를 일삼는 여군’으로 몰아갔다. 혼인신고를 마친 날 이 중사는 자살했고, 초동수사 지휘라인은 전원 면죄부를 받았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전 세계 사회와 문화에 침투해 있는 부정적 여성 이미지가 가부장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내, 정부, 딸, 창녀, 왕비, 하녀, 계모 등의 정체성은 남성 중심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정립된 것이고, 가부장적 가치관은 남성이 정한 규칙대로 처신하지 않는 여자들을 ‘나쁜 여자’로 규정했다. 이 책에서는 신화, 성서, 문학, 시각 예술, 영화 등에 나타난 나쁜 여자를 분석했다.

윤선도(1587~1671)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일생을 기리는 만시(輓詩)에서 아내가 평생토록 옳고 그른 일도 없었고 잘 한 일도 없었다며 칭송했다. 어질고 효성스러운 딸이자 며느리, 존재감 없이 성실함으로 내조 잘하는 여자, 이것이 조선시대를 주도한 지배계층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부여한 기본값이었다. 잘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잘 하는 쪽으로도 튀지 않는 무비무의(無非無儀)에 더하여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마땅한 도리였다. 여기서 벗어나면 ‘나쁜 여자’로 몰렸다.     

 

여성을 야생동물과 같은 분류로 간주

기원전 8세기 말경 농민 시인인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는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계속해서 길들여지고 문명화되어야 하는 땅이나 야생동물과 같은 부류”라는 여성혐오의 시각을 반영했다. 『신들의 계보』에 의하면 판도라가 항아리 뚜껑을 열었기 때문에 세상에 죽음, 재앙, 고통이 가득 차게 되었다. 남성의 삶에 재앙을 가져오는 문제의 원천이 판도라라는 여자의 행동 탓이라는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계기도 여신 아프로디테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임을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여신 아프로디테는 유부녀인 헬레네가 파리스를 만나게 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신화는 “여성은 자신의 외모와 허세 섞인 자존심에만 집착한다”라는 여성관을 반영하는 이야기였다.

기독교의 가부장적 통념에 의하면 여성은 열등하고 부정한 존재이며 여성성 자체가 악이다. 기독교는 마녀재판을 부추겼다. 마녀사냥은 십자군 원정 실패 후 가톨릭 교회가 종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단 신앙을 공격한다는 핑계로 시작됐다.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에서 종교재판을 할 수 있었다. 마녀를 판정하는 수단은 혹독한 고문을 통한 자백이었다. 1623년에서 1633년 독일 밤베르크의 요한 게오르크 2세는 600명의 마녀를 불태워 죽였다. 1676년 독일 이드슈타인 시는 시의 재정을 불리기 위해 마녀사냥을 이용했다. 1448년 남프랑스에서 한 노인은 마녀재판을 받았고, 그의 재산은 대주교와 종교재판소의 몫이 되었다. 마녀사냥의 희생자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었다.

성서의 저자들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게 간주하는 가부장적 고대 근동 문명권의 남성들이었다. 따라서 성서에는 여성 비하나 여성 혐오적인 태도가 투영됐다. 성서는 세상에 최초의 죄를 가져온 것은 여자인 이브라고 기록했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었기 때문에 세상에 죄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여성의 성을 악의 은유로 자주 사용했다. 솔로몬의 잠언은 경계해야 할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나쁜 여자’를 사용했다.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서 집필된 신양성서에서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정신이 반영되어 있지만 구약성서처럼 극단적인 혐오감은 덜하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서나 지혜문학에서 ‘나쁜 여자’에 해당하는 여인들의 계보에서 탄생했다. 기원전 17∼16세기경의 과부였던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 유다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고 쌍둥이를 출산한 ‘나쁜 여자’다(창세기 38장). 쌍둥이 중 하나인 베레스가 다윗의 조상이고, 예수의 부친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다(마태복음 1장). 강자의 논리와 폭력으로 점철된 고대 가부장제에서 살아 역사를 이어간 여성들과 예수의 족보에 의하면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분법적 재단은 허구적이다.   

『가부장제 깨부수기』(마르타 브렌 지음, 아르테)는 가부장제의 시초를 서구문명이 탄생했다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질투가 강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음란하고, 게으르고, 거짓말도 잘하고, 겁도 많고 나약한” 존재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당신을 낳아주신 어머니도 여자입니다”라는 진실을 말한다면 자신의 이분법에 담긴 허구를 깨닫게 될까.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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