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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최승우
  • 승인 2022.06.03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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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외 23명 지음 | 한겨레출판사 | 295쪽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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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일상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자리에서
진보와 혁명을 추구한 시인, 김수영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긍지와 사랑의 예언

2021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한겨레》에서 ‘거대한 100년, 김수영’이라는 타이틀 아래 반년간 평론 26편이 기획·연재되었다. 신문 한 면을 통째로 열어 한 시인을 이토록 다방면으로 조명한 특집이 극히 드문 만큼, 여전히 뜨겁게 호명되는 김수영의 문학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연재 글들을 수정·보완하고 육필 원고와 발표 지면 등 최초 공개되는 자료 및 특별 대담과 함께 엮어 새롭게 선보인다. 해당 분야의 전문 연구자인 24명의 시인과 문학평론가가 필자로 대거 참여했으며 가족, 일본/일본어, 한국전쟁, 전통, 돈, 비속어, 번역, 여혐, 니체, 온몸, 죽음, 사랑 등 26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김수영의 생애사와 작품론에 두루 접근하여 이해의 폭을 한층 넓힌다. 김수영의 삶과 작품을 단순히 우상화하거나 신화화하는 대신 지금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다는 점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는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의 한 구절이며, 전통에 대한 긍정, 평범한 민중에 대한 긍정, 자유와 혁명에 대한 긍정, 더 나아가 자신을 향한 지금 세대의 날카로운 비판에 대한 긍정까지 담아낼 수 있는 호탕한 제목이다. 이 책은 김수영을 각기 다른 키워드로 분석했다 하더라도 전기사적 요소를 배제하진 않았는데, 다양한 키워드와 평전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김수영의 삶과 문학의 전체적 면모를 직조한다.

1921년에 태어나 1968년에 세상을 뜬 시인 김수영. 한국 근현대사의 파고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시인의 삶을 떠올려본다. 누구보다 뜨겁게 자유를 갈망했지만 누구보다 먼저 혁명의 실패를 예감했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혁명 이후에 대해 사유했던 시인. 이것만으로도 김수영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_본문에서

김수영의 거침없는 문학적 모험,
빛과 그늘을 아우르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26가지 시선

1부 ‘탄생과 일제 강점기’에서 「아버지를 바로 보지 못하던 시인, 그렇게 아버지가 되다」는 8남매의 장남으로 자라났으나 장남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은 김수영이, 시에서 아버지와 누이를 성찰과 정시(正視)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호명한 방식을 면밀히 검토한다. 「모더니즘 이전에, 이미 핏줄에 흐르고 있던 선비 정신」은 단순히 서양의 모더니즘을 한국적으로 소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양과 서양의 정신을 종합하는 작시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김수영의 위대함을 재발견한다. 「망령 씐 ‘식민지 국어’라도 맘껏 부려 썼다」는 일본어 창작을 곧 반민족으로 연결하는 고정관념을 비판하며 김수영 시에서 식민 체험의 흔적을 사려 깊게 읽어낸다. 「이주와 패배, 그 극복의 원체험」은 김수영이 일본 유학과 만주 이주에서 겪은 배반의 경험을 추적하는 한편, 연극 공부가 시의 언어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2부 ‘한국전쟁기’에서 「나는 ‘민간 억류인’, 친공포로냐 반공포로냐 택일을 거부했다」는 자신을 ‘포로’ 대신 ‘민간 억류인’으로 불렀으며 ‘친공과 반공’의 이분법에서 탈피해 ‘자유’를 중시했던 시인의 태도에 주목한다. 「‘제일 욕된 시간’과 ‘벌거벗은 긍지’ 사이 생활고의 설움」은 김수영이 시에서 드러낸 대표적 정념인 ‘설움’이 촉발되는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며 생활에 대한 무능이나 무책임이 아닌 자발적 고절(孤節)로서의 소외와 긍지를 헤아린다.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라」는 서점 ‘마리서사’를 열고 모더니즘 시 운동을 전개했던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애증을 실감 나게 서술한다. 「기계와 사물의 운동을 꿰뚫어 본 관찰자」는 김수영을 기계-사물의 운동을 가감 없이 관찰해 본질을 파악한 시인으로 설명하면서 시 「헬리콥터」에 대한 ‘기계비평’을 시도한다. 「‘시간’에 민감했던 시인, 현실과 역사 앞에 물러섬 없었다」는 하이데거 전집이 낡고 닳을 만큼 하이데거에 심취했던 김수영의 시 세계를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으로 해석한다.

3부 ‘구수동 거주 시기’에서 「생활의 감각과 사랑의 기술」은 김수영이 마포구 구수동 집에서 시에 대한 조급한 욕심을 내려놓고 생활과 예술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던 시절을 다룬다. 「전통적 인간에서 전통을 생성하는 존재로」는 김수영이 전통에 대한 반감과 부정을 넘어 시로써 전통을 긍정하고 현재화하는 양상에 귀 기울인다. 「냉전적 의도가 담긴 잡지 봉투를 뒤집어 시의 초고를 써 내려가다」는 김수영에게 잡지 《엔카운터》와 《파르티잔 리뷰》가 우송된 냉전적 맥락과 이 잡지들이 시에서 어떻게 전유되며 주체성 형성의 자원으로 활용됐는지 살펴본다. 「노란 꽃을 받으세요, 지금 여기에 피어난 미래를」은 생성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꽃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자유와 혁명과 사랑이라는 꽃의 사상으로 만개한 일련의 과정을 되짚는다. 「시인으로서 자유로우려면 시민으로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불온사상을 인정할 때만 언론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며 이는 문학의 자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었던 김수영식 ‘자유’를 논한다.

4부 ‘4·19혁명 이후’에서 「시와 삶과 세계의 영구 혁명을 추구한 시인」은 김수영의 혁명은 정치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시와 삶에서 지속되는 총체적 변혁이자 거대한 사랑임을 설파한다. 「짙은 자기 환멸을 내쉴지언정 조국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는 모던한 세계를 흠모하며 조국의 후진성에 경멸을 느끼면서도 비루한 일상을 온몸으로 끌어안고자 했던 김수영의 내면을 묘파한다. 「독살을 부리는 자본 옆에서, 졸렬한 타박이라도 하여야 했다」는 물질주의에 매몰된 존재에 대한 멸시가 투영된 호칭으로서 시어 ‘여편네’의 의미를 분석한다. 「‘돈’의 아이러니 속에서 싸우다」는 먹고살기 위해 ‘매문’을 하지만 글쓰기로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 표현의 용기를 실현하기보다 상품 가치에 매몰되기 쉬운 모순을 간파했던 김수영의 글쓰기를 ‘적과의 동침’으로 설명해낸다. 「시임에도 욕설을 쓴 게 아니라, 시라서 욕설을 썼다」는 김수영의 시에 쓰인 욕설을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현이자 자유의 실천으로 규정한다. 「‘덤핑 출판사’의 12원짜리 번역 일, 그 고달픔은 시의 힘이 됐다」는 김수영이 번역을 ‘부업’ 삼았으면서도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결국에는 번역 텍스트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고유한 문학론을 구축했음을 논증한다.

5부 ‘시대를 비추는 거울’에서 「우리는 이겼다, 아내여 화해하자」는 60년대의 시인인 김수영이 짊어져야 하는 한계점을 명확히 짚으면서, 시와 산문 속에서 아내에 대한 인식은 차츰 변화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여성혐오를 넘어서는 실천은 도중에 중단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산문에 두 번 등장한 니체, 닮음과 다름」은 김수영이 니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나 출발점과 해결 방식이 달랐다고 주장한다. 「무의식적 참여시의 가능성, ‘온몸’의 시학을 다시 생각하며」는 김수영의 대표적 시론인 「시여, 침을 뱉어라」와 「참여시의 정리」를 분석하여 ‘몸과 그림자’의 관계를 밝히고 온몸의 시학을 ‘무의식적 참여시’로 적절히 설명해낸다. 「‘죽음의 시학’은 그를 여전히 살아 있는 시인으로 만들었다」는 죽음이 삶을 일깨우고 생성을 낳으며 자신을 공동체로 나아가게 한다고 보았던 김수영의 시학을 살펴본다. 「사랑의 무한 학습, 지금 여기에 꽃피는 사랑의 미래」는 김수영이 사랑을 사회가 품은 영구 혁명의 가능성이자 개인과 사회를 성장시키는 유일한 동력으로 파악했음을 강조한다. 「우주의 화음을 품은 김수영 시의 극점」은 김수영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풀」에 등장하는 풀과 바람의 관계를 ‘상응과 친화’로 설명하며, 때로는 스스로 움직이고 때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물의 속성을 보여준다고 역설한다.

“혁명이 성취되는 마지막 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100년이 흐른 지금, 김수영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김수영은 현실의 이면을 들춰내고 진실을 환기하려는 신념을 온몸으로 밀어붙여 한국 현대시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는 역사적 격랑에 촉수를 곤두세우며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에 맞서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나갔지만, 자신이 속한 시대의 한계를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오점 탓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등을 돌린 독자가 생겨나면서, 그는 부정적인 평가에 부닥치곤 했다. 그러나 그를 덮어놓고 옹호하거나 맹비난하는 관점을 넘어, 김수영이 지금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이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총체적 변혁을 추구했던 그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평온한 독서를 거부하는 시, 독자에게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하는 시를 써 내려간 김수영은 자기 작품이 지닌 한계점을 성찰의 계기로 삼는 시대가 올 것을 일찍이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비판과 부정의 대상에 자신을 기꺼이 포함했고 자신에 대한 후대의 부정을 오히려 ‘사랑’으로 인식했다. 그에게는 모든 반동을 끌어안을 넉넉한 품이 있었다.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에 실린 평론 26편은, 김수영의 명과 암을 세밀히 그려냄으로써 그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 책이 김수영에 대한 새롭고도 발칙한 ‘반동’으로 작용하길 기대해본다.

지금 세대가 불편함을 느끼고 여성혐오라고 말하며 비판하는 관점은 이해도 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수영 개인의 한계만이 아니라 시대의 한계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혐의를 부정하고 김수영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제가 덧붙여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1950~60년대를 살았던 김수영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김수영의 여성관에 대한 비판은 결국 김수영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_‘대담’에서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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