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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에 감춰진 불평등…시험은 차이를 억압한다
능력주의에 감춰진 불평등…시험은 차이를 억압한다
  • 김수아
  • 승인 2022.06.08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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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틀어보기_『한국사회에서 공정이란 무엇인가 』 김범수 지음 | 아카넷 | 272쪽

기회 균등·보편적 지원과 적극적 차별 철폐도 필요
시험은 표준 잣대를 제시하며 감시하는 체계로 작동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오해가 널리 유포되면서 이에 따른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오래된 오해 중 하나는 소위 ‘할당제’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현재 시행 중인 양성평등채용목표제를 여성 할당제라고 부르면서, 페미니즘이 여성의 특권을 주장하면서 남성을 차별하는 사상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널리 퍼져 있다. 더 나아가, 어떤 개인의 상황이 특별하게 고려되는 것이 바로 차별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게 되어 장애인과 여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우대 조치가 모두 부정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공정’을 원한다는 슬로건으로 축약되는 모양새이다. 

 

사실 우리 공교육에서 이미 형평성, 공정성, 정의와 평등 그리고 차별 등의 다양한 개념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학습’이 사람들의 일상에 연결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기회·결과 평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정치권의 정쟁 소재로 공정 담론이 소비되는 상황이다. 이 책은 이처럼 공정에 대한 논의가 정쟁 도구로 단순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정의와 공정을 연결하여 공정 담론의 확장을 위한 논의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롤스, 노직, 드워킨, 센, 왈저, 영 및 바이츠와 같은 7명의 정치철학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선별적 복지, 소득 격차, 상속, 입시, 단순 분배, 소수자 우대 제도, 외국인 재난 지원금과 같이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서 논의된 뜨거운 주제들에 대해 답한다. 

페미니즘이 오히려 차별적 사상이라는 오해와 관련하여 적극적 차별 철폐 조치와 정의를 말하는 아이리스 영(1949∼2006)의 사상을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이리스 영은 경제·정치·문화적 제도들을 통해 체계적으로 재생산되는 억압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구조적 억압과 더불어 사람들의 민주적 참여를 불가능하게 하는 지배 구조 역시 철폐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정의의 필수 요소라고 한다면,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가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근거이며 구조적으로 참여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상황이 바로 부정의한 상황이다. 적극적 차별 철폐 조치들은 이와 같은 부정의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론의 하나이다. 부정의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구조적 억압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는 차이의 인정을 위해 필수적이다.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집단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는 능력주의의 담론 즉 불편부당한 단 하나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종종 여성과 소수자가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특권을 얻고 있다는 방식으로 이해되는 적극적 차별 철폐 조치에 대해, 영은 과연 이 능력이 어떻게 측정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감추고 있는 불평등이 무엇인지를 설명함으로써 대응한다. 시험이라는 형식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표준화된 잣대를 제시함으로써 그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다른 차이를 억압하는 것이자 개인을 감시하는 체계로 작동할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정의에 대한 접근 방식들을 검토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현재의 개인주의적 능력주의 접근, 즉 시험 기반 공정주의라는 다소 협소한 공정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에 근간을 둔 형식적 평등에 대한 사고를 확장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경우, 기회 균등과 보편적 지원이 중요한 영역이 있지만 어떤 경우는 보다 적극적인 차별 철폐를 위한 시정 조치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공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상황들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다양하게 대안을 마련하는 것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한 합의의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제, 이러한 과정을 경험하기 위해, 이러한 논의가 우리 사회의 파편화되고 집단 극화된 온라인 공간의 담론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길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남아 있다. 집단 극화의 안온한 공간에서 머무르고 싶은 우리들이 다양성의 가치를 논의하기 위한 다양한 공간으로 나가려면 결국 민주주의의 가치에 다시 주목하고 참여라는 시민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우리 사회의 공론장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와 연결하여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여성학협동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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