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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자기를 보는 어떤 시선
[디자인 파노라마] 자기를 보는 어떤 시선
  • 오창섭
  • 승인 2022.06.10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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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㉑_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윤두서의 자화상.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고산 윤선도전시관 소장)
윤두서의 자화상.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고산 윤선도전시관 소장)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SNS는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무엇보다 셀카의 인기가 여전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린다. 인스타그램만 보더라도 ‘셀카’라는 해시태그를 단 이미지가 1억 개에 육박한다. 그 이미지를 올린 사람들은 올리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이래로 사진은 찍는 게 아니라 고르는 것이 된 만큼, 그 이미지의 주인공들이 자기 모습을 밀도 있는 시선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자기 모습을 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거울은 이 경험을 가능하게 해왔던 전통적인 사물이다. 거울은 기본적으로 거울을 보는 이를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을 지각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자신을 지각하는 행위는 자주 성찰이나 반성과 연결되곤 한다. 여러 문학 작품에서 거울을 보는 행위를 자각이나 성찰을 뜻하는 것으로 표현해왔던 건 그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마주하고, 그로부터 존재를 자각하며, 성찰과 반성을 이어가는 것은 지극히 근대적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오늘날 셀카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성찰이 자리할까? 자신을 찍어 올리는 행위를 추동하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자화상과 거울의 차이

얼마 전 네댓 명의 선후배와 함께 은사님을 뵈었다. 반가운 만남이라 그런지 자리는 즐겁고 유쾌했다.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면서 가진 오랜만의 회합이라는 점도 유쾌함을 더한 이유였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즐거운 자리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한 선배가 가방에서 자신의 학위 논문을 꺼냈다. 선생님을 뵙는 자리라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선배는 10여 년 전에 미술사에 관심이 있어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과정을 마치고도 논문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코로나로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마침내 논문을 마무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득 코로나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의 논문 주제는 ‘한국의 자화상’이었다. 자화상이라는 주제가 어딘지 모르게 논문을 쓰도록 한 코로나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자리를 파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객차 안은 한적했다. 덕분에 편하게 앉아서 이동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맞은편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그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선배의 논문에서 본 윤두서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그 자화상 속 인물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로 인해 그림을 보는 이는 그림 속 인물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윤두서를 떠올렸다. 자신을 그리는 그를, 그려지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그를 말이다. 하얀 종이 위에 서서히 자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경험은 거울을 보는 경험과 비교될 수 있다. 거울 앞에 선 자는 자신을 보면서 생각한다. ‘저게 나구나.’ 그 모습은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모습을 바꿀 순 없다. 그게 거울의 논리다. 하지만 자화상은 다르다. 거기에는 자신이 보고 싶은 자기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수많은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렘브란트를 떠올린다면 이런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보고 싶어 한 자기 모습을 자화상이라는 형식으로 그려냈다.

물론 거울을 보면서도 옷매무새 정도는 다듬을 수 있다. 그러면 거울 속 자기 모습이 달라진다. 많이 양보한다면 이것도 그림을 그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자화상을 그리는 것처럼 내 앞에 자리한 화판에 그리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그린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화장은 어떨까?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누군가를 떠올려 보자. 자신을 바라보며 화장하는 누군가를, 화장이 진행됨에 따라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말이다. 이것은 흡사 자화상을 그리는 이가 서서히 드러나는 자기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과 닮았다.

거울은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보여준다. 거울은 자기에게 뿌려지는 시선이다. 그 시선이 바라보는 자기 모습을 통제하려는 욕망, 그 시선에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게 하겠다는 의지가 화장하는 몸짓 어딘가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타인? 물론 많은 경우 거울의 시선은 타인의 시선과 겹친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 없는 타인의 시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럼 없이 거울의 시선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은 타인의 것만은 아니다. 때에 따라 거울의 시선은 거울을 바라보는 이의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화장하는 이와 그런 그를 바라보는 거울의 시선은 하나가 된다. 이 구도는 지극히 나르시스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셀카와 SNS가 바꾼 시선의 방정식

이런 나르시스적인 시선을 인스타그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은 기본적으로 시선의 플랫폼이자 욕망의 플랫폼이면서 동시에 전략의 플랫폼이다. 그 플랫폼을 채우는 수많은 이미지는 욕망하는 시선에 화답한 결과물이다. 이미지는 타인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미끼처럼 ‘좋아요’를 기다린다. ‘좋아요’는 존재의 해상도와 관련된 무엇이다. 그 때문에 ‘좋아요’ 수가 하나둘 늘어남에 따라 존재의 해상도도 따라서 높아진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좋아요’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이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당신 곁에 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멋있습니다’ 등의 의미를 가진 기호로 하트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들의 합창이 아닌가?

그런데 최근에 이와는 다른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셀카를 찍어 올리는 행위에 얽힌 시선의 방정식이 바뀌고 있다. 더는 타인들의 시선에 화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선의 대상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들이 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미지들에서는 사진을 찍는 이, 대상, 계정에 사진을 올리는 이,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을 보는 이가 동일인이다. 그 이미지들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일까? 그런 이미지는 어딘지 모르게 자화상답다. 이 자화상다운 이미지를 찍어 올리는 이들의 관심은 성찰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히려 폐쇄적 고리 속 자신의 만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찍히기 위해 존재하고, 그렇게 찍은 사진을 보기 위해 존재한다. 자신의 시선만을 의식하는 이런 쿨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개인주의일까, 정말 쿨함일까. 아니면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메타 자아의 만족감일까.

 

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디자인연구자로 한국디자인학회 최우수 논문상(2013)을 수상했으며,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안녕, 낯선 사람」 전시(2017)와 DDP디자인뮤지엄의 「행복의 기호들」 전시(2020)를 기획했다. 저서로 『내 곁의 키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메타디자인을 찾아서』, 『인공낙원을 거닐다』,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근대의 역습』, 『우리는 너희가 아니며,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등이 있다. 현재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디자인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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