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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로움을 중지할 자유가 없다”
“우리는 자유로움을 중지할 자유가 없다”
  • 김재호
  • 승인 2022.06.2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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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⑧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달 21일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가 「실존과 자유」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9강은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철학과)의 「분별심으로부터의 자유: 불교의 깨달음과 해탈」, 제10강은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의 「도가의 자유관」, 제11강은 장동진 연세대 명예교수(정치사상)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역사와 전개」, 제12강은 박찬표 목포대 교수(정치언론홍보학과)의 「자유, 공화주의, 다원주의」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의식은 자신을 본질적 방식으로 규정하는 걸 부정
나와 타인의 자유는 시선 투쟁으로 결판나는 관계

사르트르(1905∼1980)는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자면, “우리는 자유로움을 중지할 자유가 없다”이다. 사르트르의 자유에서 중요한 개념은 의식이다. 의식은 이미 늘 ‘자기’ 앞에 현전한다. 의식의 이러한 존재 방식을 ‘자기에의-현전’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의식은 이미 늘 자신을 마주한 이른바 ‘대자(對自)’로 존재한다. 이때 의식은 반성적인 자각의 상태건 반성 이전의 수동적인 상태건 상관이 없다.

의식은 항상 저 자신(의 내용)을 부정하고 벗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초월해가고자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에서 주체는 근본적으로 자기동일성 즉 “나는 나다”에 따라 성립하지 않고, ‘타이성’ 즉 “나는 내가 아니다”에 따라 성립한다. 의식이 매 순간 저 자신을 본질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을 부정하고 그리하여 매순간 그 본질의 내용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존재함을 ‘현존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의식이 현존하는 것을 일컬어 ‘대자존재’라고 일컫는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는 사르트르의 존재, 의식, 자유, 사랑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개념을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의식이 본질에 있어 규정되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영원불변한 본질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시간적인 경험에 따라 가변적인 내용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같이 의식이 본질적인 어떤 내용으로 규정될 때 그렇게 규정되는 의식 자신을 일컬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즉자존재’라고 한다.

의식은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두 존재 방식을 동시에 띠면서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대자로서의 의식은 내용을 지닌 즉자로서의 의식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의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식은 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현존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결여’로 느끼고 그 결여를 메우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그 결여는 본질에 따라 규정되는 즉자존재로서의 자기에 의해 메워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안다. 하지만, 대자로서의 의식은 즉자로 주어지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현존할 수 없기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래서 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결여에 시달린다.

이제 충분히 대자적이면서도 즉자를 받아들여 완전한 충만을 이루었으면 하는 욕망이 생긴다. 사르트르는 이를 의식이 즉자대자적이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 즉자대자적이고자 하는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지녔다. 하지만, 쉽게 간파할 수 있듯이, 사르트르는 이 욕망의 실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본질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즉자로서의 의식 자신에 끌려가 침몰하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고 본다. 즉, 자유는 대자인 의식으로서 끊임없이 즉자인 의식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데서, 그럼으로써 의식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로 드러내는 데서 성립한다고 본다.

대통령인 자가 있다고 쳐보자. 그를 보고 누군가가 “당신은 오로지 대통령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과연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렇게 봐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할까? 아니면, “듣고 보니 왠지 못마땅하군요”라고 할까? 만약 고맙다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을 대통령으로서의 즉자적인 자신에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꼴이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자유를 상실한 자일 것이다. 또 만약 못마땅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랍시고 제 아무리 대단한 인물로 규정될지라도 대통령이라는 규정과 그에 따른 일체의 규정을 벗어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확보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자임을 내보이는 것이겠다.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의식인 한에서 대자적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언제나 내외부에서 주어지는 일체의 규정들을 부정하고 무화하고 초월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자유를 파악한다. “인간 존재와 그의 자유로움에는 차이가 없다”라는 말은 이를 압축해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는 근대의 정치철학자들이 말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라는 언명을 철학적으로 달리 표현한것이라 할 것이다.

일체의 대상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도 사로잡히지 않음으로써 매 순간의 현존으로서만 행위하는 것이 시간화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외부의 대상적인 존재를 목적으로 삼는 데서 벗어나 이미 늘 저 자신을 목적으로 삼아 미래를 향해 자신을 자신에 앞서 내던지는 것이 곧 시간화이다. 그리고 다름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시간화가 자유이다. 간단히 말해 시간화는 우리가 무임으로써 객관적인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저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유와 선택은 하나이기 때문에 자유에 결정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흔히 결정론은 몸이 없이는 의식이 성립할 수 없고, 몸은 근본적으로 의식과 별개의 존재로서 의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바탕에서부터 결정하는 원인이 된다고 여기는 데서 성립한다. 이런 관점에서 몸은 철저히 객관적인 물질적 존재로서 취급된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몸에 관한 이러한 객관주의적인 관점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에서 일어나는 관계는 철저히 배타적이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시선 투쟁을 통해 결판이 나는 관계이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 관계는 더없이 힘겹고 고달프다. 이에 그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의 자유를, 특히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유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그 자유로써 자신을 선택해 사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예속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사랑과 자유의 관계는 그야말로 모순 감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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