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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에서 광대로…국가 제재 피해 소리꾼이 되다
무당에서 광대로…국가 제재 피해 소리꾼이 되다
  • 유무수
  • 승인 2022.06.24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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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판소리 문화사』 김현주 지음 | 민속원 | 384쪽

판소리 광대의 전통은 고대 제사장까지 이어져
기예를 팔며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수련·연마

판소리는 “긴 사설 내용을 지닌 이야기를 가창하는 최초의 산문 장르”였다. 조선 후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판소리는 “불쑥 튀어나온 문예 양식이 아니라 긴 시기의 모색과 단련 과정을 거친 것”이다. 판소리 문학을 포함한 고전문학을 연구해온 김현주 서강대 명예교수는 이 책에서 판소리가 형성되고 성장한 문화적 배경의 의미층을 살폈다. 저자에 의하면 현실의 문제를 연극화하는 판소리 광대의 뛰어난 자질의 전통은 무당들과 고대 제사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역사의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무당은 광대의 성격을 함축한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 고대 제천 의례에서는 집단적인 음주가무 행위가 있었다. 무당이 신령의 특정한 움직임을 흉내 내기 위해 춤을 추면 집단구성원들도 강한 비트의 타악기 선율에 맞춰 신명나는 춤을 추었다. 그리하여 구성원들의 유대가 공고해졌다. 위정자가 바라는 사회적 결속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제사장이었던 무당이 정치적인 권력자인 군장을 겸했으나 점차 제정이 분리되면서 무당의 권력은 약화되어갔다. 무당의 제의행위는 국가 제재를 받았고 성 밖이나 지방으로 쫓겨난 무당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무거웠다. 장래가 불투명한 무당의 자녀들은 음악적 자질을 살려 국가 음악기관의 악공이나 관비로 진출했고, 조선후기에는 남사당패도 하나의 돌파구였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는 무속을 제재했지만 제사음악에 필요한 악공을 무당의 자식들 중에서 조달했다. 민간에서 점복을 찾는 수요는 증가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민간에서는 병자가 생기면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였고 굿판은 춤과 노래로 신명풀이를 하는 형식이었다. 사대부집, 부유한 민간집, 왕실의 여인들이 번창과 강령을 위한 기복제를 지내고자 할 때 무당을 불렀다. 기복굿에서 무당은 예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현란한 가무악(歌舞樂)을 펼쳤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규모가 가장 컸던 국가제전은 나례(儺禮)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실과 국가의 액을 떨쳐버리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나례라는 제전을 시행했다. 나례는 점차 놀이 중심의 나희(儺戱)로 전환돼갔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어느 광대는 나희에서 악기 소리를 성악으로 내서 주목을 받았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우인(優人) 공결(孔潔)은 농사의 고달픔이라는 백성의 정서를 담은 민농시(憫農詩)를 빠르지 않은 장단으로 읊조려 주목을 받았다. 공결의 노래는 사회 부조리를 비판한 것이었고 이러한 형식은 판소리로 이어졌다.

유통음악이 다양화되고 음악을 향유하는 사람이 다변화된 것은 조선중기 이후였다. 국가 공식음악은 「악학궤범」에서 규정한 대로 장대하고 아정한 형식이었으나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교방가요는 잡가, 무속음악, 하층민의 민요조 노래도 포괄했다. 이런 가운데 북 반주를 배경으로 하는 파격적인 성악인 판소리라는 음악 형태가 등장했다. 판소리 담당층은 광대였으며, 판소리 광대는 국가기관 소속에서 벗어나 개인의 의지로 자신의 기예를 팔며 살아남아야 했기에 치열한 수련으로 기예를 연마했다. 김려(1766∼1822)가 지은 「담정총서」의 기록에 의하면 가객 송실솔은 소리의 우렁찬 기운을 얻기 위해 폭포수 아래에서 소리가 물소리를 뚫고 나갈 때까지 연습했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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