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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쪽같은 사법정신의 상징
대쪽같은 사법정신의 상징
  • 김희정
  • 승인 2022.06.22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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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⑯_김희정 충남대 초빙교수·자유전공학부
가인 김병로. 사진=위키피디아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일제 강점기 인권변호사로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 대한민국 사법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전쟁 이후 요동치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추상같은 비판으로 헌법의 보호를 끌어냈던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 같은 프로필 뒤에는 글로 읽기에도 벅찬 고난과 힘든 시간이 가득 차 있다. 이 지면은 정의와 공정이 사치이기만 하던 시절, 기구하기 짝이 없을 만큼 황량한 삶을 살았던 시대에 스스로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던 가인 김병로의 실천적 리더십을 생각하는 공간으로 할애해 보고자 한다. 한 페이지 남짓 한 공간에 그의 삶의 궤적을 묘사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단 몇 줄의 정보라도 있어야 ‘자연인으로서 그리고 리더’로서의 가인 김병로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적어본다.

그는 산간벽지였던 순창에서 태어나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조모의 인도로 초등교육을 받았다. 청년기에 목포항에 나왔다가 일본의 군함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아, 그 이후로 외국에 대한 공부를 하고, 의병항쟁과 학교 운동을 하였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나라 없는 서러움을 견디며 법학 공부를 했고, 고국으로 돌아와 일본을 상대로 법적 항쟁을 시작했다. 가인 김병로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며 끝까지 황민화를 거부했고, 해방이 되어 대법원장이 됐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아픈 다리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여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까지 받게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아픈 몸을 견디며 대한민국의 기본법전을 만들었다. 초대 대법원장으로서의 김병로는 가장 혼란한 시기에 추상같은 법관의 윤리를 정립했고, 정치적 압박을 물리치며 고심 하는 법관들의 든든한 배경이 돼주었다. 1957년 12월 대법원장을 퇴임한 김병로는 정치적 혼란 속에 헌법의 정신을 지키기를 촉구하였고 호소했다. 가인 김병로는 1964년 78세로 별세했다. 

“요즘 헌법 잘 계시느냐?”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을 만나러 온 법무장관에게 대법원장 김병로의 근황을 물으며 했다는 말이다. 헌법과 법률을 들어 번번이 반대 입장을 고집하던 김병로의 강직한 성품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담은 말이었다. 시대가 혼란하니만큼 적당히 시류에 젖어갈 수 있었을 법도 한데, 가인은 헌법원칙과 민주주의를 들어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고 목적은 무엇인지 정교하고 단호한 법리로 전달했다. 

“민주정치는 동의에 의한 정치이다. 그리고 그 동의는 토론과 합법적인 절차에 의하여 주권자인 국민의 주시하에 행하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고수의 의사일지라도 충분히 검토, 반영되는 점에 민주정치의 우수성이 있는 것이며, 다수결 원리도 이러한 태도에서만 민주정치의 자랑스러운 속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병로, 이사파동유감, 사상계, 제68호, 1959.3, 20면)

대법원장이었던 그는 법관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아 생계를 꾸리기에도 어려운 것을 늘 미안해하면서도, 법관이 정의를 사수하지 못하면 일반 국민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며, “사법관들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됨으로써 3천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의 권위를 세우는 데 휴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공정과 정의의 저울은 일상에서도 절대 자신 쪽으로 기우는 법이 없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가족들에게 ‘각자 살아 남으라’는 말을 하고 손자 한명만을 데리고 부산으로 남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른 공직자들은 공관 자동차를 이용하여 가족들과 재물을 피난시켰다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내려왔고 심지어 그의 부인이 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김병로의 공인의식은 그 외에도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자신의 질녀가 유력한 가문과 결혼을 하자 아예 관사 출입 자체를 막았던 것이나,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가옥을 손쉽게 재산으로 편입하던 고위공직자들의 관행을 거부 했던 것들은 아주 많은 일화들 중 일부이다. 

그는 헌정 초기 가장 이루기 어려웠던 ‘사법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이론’을 ‘경험’으로 바꾸었고, 법관윤리를 정립했다. 김병로의 탁월한 지도력과 솔선의 자세가 없었다면 사법부의 독립과 위상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어려운 현실일수록 솔선하는 공정과 정의가 없이는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법부를 이끌었던 김병로. 그를 지금의 한국의 현실과 맥락에서 읽는다면 리더의 자세와 조건을 새삼스럽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희정 충남대 초빙교수·자유전공학부

고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동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충남대 자유전공학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테러리즘과 자유, 안전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연구 관심분야는 안전, 정당, 정보인권, 구금인권, 선거, 교육권 등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자유권 위원으로 구금, 군인, 국제인권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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