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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5] 시대와 불화했던 작가, 죽어서 화해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5] 시대와 불화했던 작가, 죽어서 화해하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6.20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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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카프카. 사진=위키미디어
카프카. 사진=위키미디어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불화했다. 그런데 그 불화는 우리나라의 어느 우익작가가 말하는 ‘시대의 불화’라는 것과는 다르다. 그가 말하는 ‘시대의 불화’란 우익이 아닌 좌익과의 불화를 말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이 시대를 지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한 번도 시대와 불화한 적이 없고, 정확하게 ‘적과의 불화’라고 했어야 하며, 그런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있는 것이니 특별히 불화라고 할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세상이 아닌 이상 서로 대립하는 세력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언제 어디서나 시대와 불화한다. 카프카도 그랬다. 그는 평생 고독하게 살았고 40세에 병으로 죽으면서 자기가 남긴 글을 모두 불살라달라고 절친에게 부탁했으나 절친은 그것을 태우기는커녕 발표해서 카프카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니 살아서는 시대와 불화하다가 죽어서야 비로소 시대와 조금이라도 화해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그의 전집이 나왔고 그밖에도 많은 책이 번역됐지만 그가 말하는 권력에의 저항이 우리 시대의 주류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지금 카프카는 우리 시대와도 여전히 불화 중이다. 

카프카가 살았던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체코 프라하에서는 독일인과 체코인, 유태인들이 여러 형태의 갈등양상을 빚어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아래 존재했던 체코는 군국주의적 의무교육을 실시했으며, 오스트리아 정부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꿈꿨다. 심지어 체코에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감정이 지배하고 있어, 사회주의자나 노동자들끼리도 독일인과 체코인으로 분열되는 형국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 전반은 반유태주의의 열풍에 휩싸여 죄 없는 유태인들이 종종 희생당했다. 카프카는 시대의 격동기 속에서 성장한 것이다. 카프카는 수직적으로 체계화된 관료사회를 경험했고, 세계 1차대전이라는 제국주의적 참상을 목도하기도 했다. 

 

법은 법일 뿐, 가까이 갈 수 없다

2003년 나는 카프카를 아나키스트로 본 책을 썼다. 당시 카프카가 난해한 작가, 병적인 환상가, 고독한 몽상가라는 일반적 인식에 반대하여 그를 권력과 싸우는 수단으로 글쓰기를 택했던,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반(反)권력주의자로 살았던 인물이라고 했다. 억압받는 사람, 노동자에게 연민을 품었고, 그들을 위해 사회주의 운동의 선에 서서 절대자도 지배 권력도 없는, 서로 함께 노동하고 자급자족하는 사회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라고 했는데, 2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카프카의 '변신' 일러스트. 사진=픽사베이
카프카의 '변신' 일러스트. 사진=픽사베이

물론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도 어떤 정치적 교리로 협소하게 잘못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권위에 대한 혐오감, 아나키즘적 성향과 아나키즘에 대한 공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들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통하여 그가 아나키스트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대부분 그를 그렇게 보지 않지만 말이다.

가령 카프카의 짧은 단편소설 『법 앞에서』가 있는데 그 해석은 다양하다. 가령 신학적 해석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법’을 낙원, ‘문지기’를 권력으로 보고, 작품의 주제를 ‘신과 인간의 괴리’로 파악한다. 한편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법을 성적 대상으로서의 어머니, 문지기를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거부하는 아버지로 본다. 
그러나 카프카가 말하는 법이란 그저 ‘법’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에 가까이 갈 수 없다.”(이주동 롬김, 『변신』 554쪽). 사람들은 그 소수의 지배자가 지정한 법체계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종용하게 내버려둔다. 따라서 『법 앞에서』는 국가권력에 대한 신봉과 정치적 미숙에 대한 풍자이자, 자신들의 지배를 합법화시킬 수 없는 권력을 공격하는 글이다.

 

카프카를 아니키스트로 만든 폭력과 권위주의

내가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를 낸 2003년은 1883년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난 지 120주년 되는 해였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또 권위주의적인 학교에 다니면서 아나키스트적인 반항심을 가진 그는 17세가 된 1910년부터 1912년까지 프라하의 아나키스트 조직과 연대하면서 바쿠닌과 프루동을 비롯한 아나키즘 사상에 지대한 관심을 쏟기도 했다.(구스타프 야누흐, 편영수 옮김, 『카프카와의 대화』, 190쪽)

카프카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권위주의적인 학교에 다니면서 아나키즘적인 반항식을 갖게 됐다. 사진=픽사베이

그 출발은 가족의 전제적 권위라는 정치적 폭정의 전형이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프카는 직원들에게 가한 아버지의 잔인하고 부당하고 자의적인 대우에 직면하여 본능적으로 희생자들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을 공부하고 14년간 준공공기관인 산업재해보상공사에서 근무했는데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들의 편에서 일하면서 법에 의해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그들과 한편이 되었다. 다행히도 그 직장은 오전 8시에서 오후 2시까지 근무하는 곳이어서 그 뒤 그는 점심을 먹고 신문을 본 뒤에 두세 시간 낮잠을 자고 산책을 한 뒤 가족과 식사를 하고서 밤 10시부터 집필을 할 수 있었다. 

거대한 법체계에 의해 종용당하기만 할 뿐 법적 체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약자의 모습을 형상화한『소송』의 주인공 K는 합법적 헌법이 있고 보편적인 평화가 있으며 모든 법이 시행되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자기 집에서 붙잡혀 개처럼 죽어간다. 여기서 카프카는 모든 형태의 국가와 국가 자체를 권위주의적이고 자유파괴적인 위계질서로 간주한다. 국가와 국가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거짓말에 기초한 시스템이다. 권위는 모든 비인격적인 메카니즘에 내재돼 있다. 권위는 위계적이고 추상적이며 ‘비인격적인’ 장치다. 잔인하고 하찮고 추잡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은 이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카프카는 관료적 기계가 개인 간의 관계가 하나의 사물이나 독립된 대상이 되는 맹목적인 톱니바퀴 네트워크처럼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환상을 통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환상을 보여주다

이처럼 카프카의 소설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요소들은 그저 몽상이나 망상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권력을 가시화한 것이다. 『성』도 권력에 대한 소설이다. 성의 주인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국가의 기능과 개인의 운명에 대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며 그 한계를 설정하고 금지하며 규정하고 굴욕을 주고 통제하며 속이고 꾸물거린다. 민중은 그냥 권력에 호소하고 간청하며 희망하고 기다릴 뿐이고 언제나 거절당하고 허위의 약속만을 다짐받는다. 결국, 희망과 지연의 미로 속에서 그들이 얻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세련되고 교묘하게 움직이는 권력의 끝없는 활동조직은 완전히 무용하게 돌아간다. 그 전제적인 권력은 저속하고 제멋대로이며 잔인하고 거만하며 변덕스럽고 추악하다. 

카프카 소설의 핵심은 아나키즘이다. 그는 환상적인 상상력으로 전체주의 국가의 정의와 나치 또는 스탈린주의가 시련을 보여줄 것을 예견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들은 악과 무분별한 세계질서의 필요 도구이다. 그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인간은 더듬거리며 길을 찾으려고 애를 쓰며 움직인다. 왜 인간은 인간을 억압하고 괴롭히는가? 아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나는 포기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악의 지배를 확신하지만 악과 타협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나키스트 카프카의 정신이다. 카프카 소설의 핵심은 아나키즘이다. 그가 국가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개인을 짓밟고 질식시키거나 죽이는 비인격적인 지배 시스템으로서의 행정이나 사법의 형태다. 이것은 비자유가 만연한 고통스럽고 불투명하며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시련은 종종 예언적인 작업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환상적인 상상력으로 전체주의 국가의 정의와 나치 또는 스탈린주의가 시련을 보여줄 것을 예견했다.

카프카는 현대문학의 방향성을 새롭게 제시한 소설가로 불리며, 20세기 이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카프카는 자기 스스로의 고독에 심취해 내면적 독백만을 되풀이한 작가가 아니라 관료주의 체제의 위계권력, 근대법의 비인간성과 꿰뚫어 보고, 산업주의사회의 권력을 세세하게 해부했다. ‘카프카에스크(Kafkaesque)‘라는 단어가 현재 우리의 어휘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용어는 사회학 및 정치학이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사회 현실의 측면을 나타낸다. 카프카는 아나키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관료주의적 악몽의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본성, 불투명함, 아래와 외부에서 볼 때 국가 위계 규칙의 불가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특성을 포착하는 데 놀랍게 성공했다. 

사회과학은 의심할 여지없이 수백만 명의 남성과 여성이 매일 겪는 현대 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를 구성하는 구체화 된 관료적 장치의 ‘압제적 효과’에 대한 개념을 아직 공식화하지 않았다. 한편, 사회적 현실의 이 본질적인 차원은 카프카의 작업을 참조하여 계속해서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카프카란 현실과 무관한 환상의 작가처럼 보여 아직도 시대와 불화 중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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