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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는 서울, 욕망의 장소들
이동하는 서울, 욕망의 장소들
  • 최지선
  • 승인 2022.07.15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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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어디서 왔니 ③ 장소의 이동

대중가요의 역사와 문화를 현장감 있게 조명한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1960, 1970, 1980, 1990)가 화제다. 이 시리즈는 한국 팝에 대한 문화연구 측면과 K팝의 뿌리를 찾는 여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특히 『한국 팝의 고고학』은 공간을 중심으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통사적으로 엮어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에 책의 공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K팝 어디서 왔니’라는 제목으로 책에서 못다한 얘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한다. 

여의도, 주류의 가요를 쥐락펴락하는 미디어센터
신촌과 대학로 소극장은 비주류 음악인들의 터전

19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군부 정권의 어두운 정치적 사건들을 이면으로 돌려놓은 대신 이곳저곳에서 축포가 터졌다. 컬러 텔레비전의 시대가 열렸고, 세상은 화려해진 것처럼 보였다. 해방 이후 지속되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1982년 해제되면서 심야는 오롯이 놀이와 유흥을 위한 시간으로 돌아왔다. 

 

언더그라운드의 터전 중 하나인 파랑새극장이 있던 (구)샘터사의 붉은 벽돌 건물. 사진=을유문화사
「아파트」가 수록된 윤수일 밴드 2집 뒷면의 풍경. 사진=을유문화사

1980년대 후반에는 올림픽을 비롯해 각종 초대형 이벤트를 알리는 애드벌룬이 한껏 분위기를 달뜨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3저호황이라는 경제적 축과, 청(소)년층 인구의 급증이라는 사회적 축이 만나면서 대중음악 산업은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음악인들 역시 각자의 목표를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들국화는 ‘행진’하겠다고 선언했고, 노찾사(노래를찾는사람들)는 ‘그날’을 위해 기다리고 투쟁하겠노라고 선포했다. 조용필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왜 ‘높은 곳’까지 오르려는지 묻지 말라고 노래했다. 

각자 욕망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는 가운데 1980년대 서울은 음악적으로 재편성·재배치되었다. 종로와 을지로에 사과나무와 감나무를 심어보자는 이용의 노래 속 서울은 1982년 무렵(혹은 그 이전)의 풍경이다. 1960년대의 명동(애드 훠, 「나도 같이 걷고 싶네」)이나 1970년대의 종로(이장희, 「그건 너」) 같은 장소들은 더이상 1980년대를 선도하는 핫스폿이 아니게 되었다. 음악 산업(방송·음반·공연 등)을 위한 장소들은 이제 (구)도심으로부터 멀어져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동에서 가장 먼저 손꼽을 분야는 여의도를 중심으로 재편된 방송 산업이다. 여의도가 개발된 이후 방송국들은 이곳에 속속 이전하였고,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공영 KBS와 민영 MBC의 양사가 주도하는 체계가 확립되면서, 여의도는 주류의 가요를 쥐락펴락하는 미디어 ‘센터’의 상징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주변에 음반사 사무실 또는 기획사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유흥업소·나이트클럽의 무대로

여의도에 집적된 방송가와 달리, 대개의 다른 부문은 한강 남쪽으로 향하였다. ‘남서울’ 또는 ‘영동’ 개발을 통해 논밭을 갈아엎고 대대적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사실은 표면적인 부흥이다. (구)도심에서의 규제를 피해 유흥 산업도 남하했다. ‘강남 1번지’로 불린 신사동 등지에는 유흥 업소와 호텔이 연이어 지어지고, 가수들의 무대가 되는 나이트클럽이 줄지어 개장해 성시를 이룬 사실이 다뤄져야 한다. 「비 내리는 영동교」나 「신사동 그 사람」 등처럼, 트로트는 지명을 소재로 삼는 특유의 관습과 융합해, 강남으로 몰려들던 여러 외지인의 정서를 호명하고 ‘밤문화’를 표상하는 등 나름의 ‘영동 스타일’을 확립했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 ‘제2의 신사동’으로 부상한 방배동 일대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몰려들었다. 이곳을 매개로 드나들던 작사가, 작곡가 및 프로듀서 등의 창작자들은 8말9초의 짧은 황금기를 구가하며, 대중성과 예술성이 조화롭게 만난 예외적 사례로 남았다. 

반면 TV나 밤무대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진영에게는 공연할 수 있는 공간들이 주효했다. 즉, 구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신촌, 나중에는 대학로 일대에는 소극장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는데 연극을 비롯해 음악 콘서트들이 이곳에서 열렸다. 대학가 특유의 분위기와 맞물린 소극장은 비주류 음악인들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그렇다면 음반의 제작과 관련된 환경은 어땠을까. 이촌동에 서울스튜디오가 설립되면서 한 시절을 풍미한 점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그 외에 서대문구(은평구) 지역에 몇몇 음반사들이 자리잡았다는 점이나, 파주와 고양, 안양과 군포 등 서울의 인근 외곽에 음반 ‘제조’ 공장들이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한국 팝의 고고학 1980』에 상술되어 있으니 생략하기로 한다. 

이렇게 각지의 물질적 여건에 따라 다른 음악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시대를 표상하는 댄스 음악이 이태원 및 서초동에서 부상한 데에 나이트클럽의 존재가 중요했다면, 파고다극장과 악기상가가 입지한 낙원동에는 헤비메탈이, 자그마한 소극장이 밀집한 신촌이나 대학로에는 블루스나 포크 음악이 울려퍼질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렇지만 더 중요하게 언급되어야할 점은, 음악이 각 장소들과 맺는 관계는 고정되거나 일면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복잡다단하다는 데 있다. 나아가 장르나 계열별로 음악적 동선은 상이해지기도 한다. 주류의 많은 히트곡들은 (이촌동의) 서울스튜디오 또는 (벽제의) 지구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되고, (여의도의) KBS나 MBC의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하며, (영동의)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연주되는 비중이 높았다. 반면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은 신문로(내수동)의 음반점에 들렀다가 동아기획 사무실에 가서 ‘일을 보고’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연주하는 등의 실천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서초동 (조)동진이 형 집’이나 ‘삼청동 (전)인권이 집’ ‘원서동 (정)원영이 형 집’ 등 사적이고 친밀한 장소가 창작에 더 중요했을지 모른다. 메탈 공동체라면 (뮤즈 에로스의 심상욱이 주도한) 석촌동의 ‘메탈 프로젝트’, 또는 (작은 하늘의 이근형과 그의 절친 신대철 등이 이끈) 둔촌동의 ‘메탈 컴퍼니’처럼 함께 모여 놀고 소통하는 장소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1980년대는 ‘다양한’ 음악이 상호 공존하며 ‘좋은’ 음악들이 많이 발표된 시대로 기억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음악이 만들어지고 순환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 및 환경의 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서울의 음악적 장소들이 이동하고 (재)배치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이 서울에 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디는 사실은 아쉽다.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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