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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 최승우
  • 승인 2022.07.1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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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기 지음 | 푸른역사 | 346쪽

도시사를 넘어 식민주의 본질 톺아보기
기업도시 흥남의 ‘발명’에서 ‘민낯’까지

흥남 하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굳세어라 금순아〉)와 함께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의 극적인 이산 장면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 강렬한 기억 때문에, 흥남이라는 도시가 일제시기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그곳에 ‘동양 최대 규모의 전기-화학 콤비나트’를 건설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는 사실은 기억되지 않는다.
약 200여 호가 터 잡았던 작은 어촌 마을은 제국 자본의 ‘개발’ 10여 년 만에 그곳은 인구 약 20만의 공업도시로 급변했다. 흥남의 전기-화학 콤비나트는 화학비료로 산미증식계획에 기여하고, 전시에는 화약, 항공기 연료 등 군수품 생산에 동원되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국책에 깊이 개입했다.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금강산, 소록도 나환자 수용시설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3대 자랑거리 중 하나로 내세울 만큼, 식민지 통치자에게 흥남은 ‘식민지 공업화’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 부교수인 지은이는 문헌 자료, 생존 일본인 노동자 인터뷰, 다양한 문학 텍스트 분석을 통해 흥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적ㆍ경제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곳에서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 촘촘히 드러낸다.

일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한 ‘노구치 왕국’
기업도시 흥남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노구치 시타가우가 세운 ‘일질콘체른’은 1927년 조선질소를 설립하고 함흥군에서 1930년 본격적인 비료 생산을 시작한다. 이때까지 ‘흥남’은 없었다. 부전강 등의 값싼 수력전기를 받기 용이하고, 비료의 수송에 편리한 이점 때문에 선택된 곳, 함흥군의 복흥리와 호남리 일대가 공장지대로 선택되어 탄생한 곳이었다. 그렇게 ‘발명’된 흥남은 ‘노구치 왕국’이 되었다. 선주민의 토지 수용 때 공권력이 동원되고, 초대 흥남 읍장이 노구치 본인이었으며, 기업이 발행한 ‘구매권’이 화폐처럼 통용되고, 자본가가 출생과 사망신고를 받는 곳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질소는 화학비료로 산미증식계획에 기여하고, 전시에는 화약, 항공기 연료 등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며 일제의 식민지 개발, 전쟁, 점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민주의를 파악하는 새로운 틀
문학을 전공한 지은이가 흥남을 보는 눈은 독특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제국 자본과 식민 권력이 일체화되어 선주민들을 추방하고 요새 같은 공장을 중심으로 주변 세계와 인간을 새로운 생산체제에 편입시켰다는 점에 주목해, 저자는 흥남을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라 명명한다. 그라운드 제로란 우선 식민 질서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 장소를 뜻하며, 동시에 식민지를 장악하려는 식민주의적 폭력의 최전선을 뜻한다. 저자는 흥남을 세 가지 전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의미 부여를 하면서 식민주의 재생산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성찰한다. 수은중독에 의한 미나마타병의 원천을 파악한 것이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식민 본국의 ‘공장법’ 규제를 받지 않은 채 기술실험을 자행해 흥남이 미나마타보다 뒤늦게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 이후로 산업공해 또는 그로 의심되는 증상이 만연되었다.

내지인의 천국, 조선인 노동자의 무덤
지은이에 따르면 흥남은 두 얼굴을 지녔다. 비료공장에 일하러 온 내지인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이른바 ‘조선수당’이 붙은 임금은 본토에서보다 두 배 가까이로 뛰었고, 사택과 기숙사, 합숙소가 제공되었다.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퇴근해 각종 취미생활과 유흥을 즐길 수 있었으며, 물가까지 저렴해 ‘귀족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선인들은 달랐다. 구룡리로 쫓겨간 선주민들은 마실 물조차 부족해 생존마저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유독물질과 각종 미세 화학물질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전쟁할 때의 하졸과 같이 공포 속에서” 일하느라 호흡기 질환을 앓아야 했으며 원인 미상의 질병과 전염병이 돌아 흥남은 ‘전염병 도시’ ‘병마의 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미처 몰랐던 그때 그곳의 인간과 문학
어쩌면 조금은 낯선 틀로 흥남을 바라본 이 책에 인간과 문학의 이야기가 더해져 풍성해졌다. 대표적 인물은 함흥 태생의 영화배우 주인규. 나운규 영화 〈아리랑〉 등에 출연했던 그는 조선질소 흥남공장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을 벌이다 ‘제2차 태평양노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는 문제적 인물이다. 동생 주선규ㆍ주인선과 지하인쇄물을 제작하거나, 명태장수로 변장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불온문서’를 반입하는 등 그의 ‘활약’은 여느 역사책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문학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다. 선주민의 애환을 다룬 한설야의 소설 〈과도기〉가 글 첫머리를 장식하거니와 그의 문학적 제자이자 흥남공장 노동자 출신인 이북명의 노동소설들에는 아예 한 장을 할애해 흥남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김남천의 〈공장신문〉, 정우상의 〈목소리〉 등 우리 문학사에서 소홀히 다뤄진 작가ㆍ작품 이야기도 값지다.

읽고 나면 이 책이 과연 역사인지 문학인지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역사는 하나의 틀로만 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고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내느냐 하는 것일 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흥남의 ‘두 얼굴’을 그려낸 이 책은, 아프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단면을 담아낸 의미 있는 성과로 읽힌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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