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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9] 바쿠닌의 파괴를 위한 창조의 삶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9] 바쿠닌의 파괴를 위한 창조의 삶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7.1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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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닌의 생애

 

미하일 바쿠닌은 러시아 귀족 가문이었으나, 가족들은 진보적이었다. 사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은 1814년 모스크바 북서쪽 트베르(Tver, 칼리닌이라고도 한다)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유구한 전통의 러시아 귀족 가문에 속했으나 당시 기준으로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소유자들이었다. 1천200명의 농노가 있는 가족 소유지에서 누이들과 함께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어머니에게서 파괴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물려받았다.

또한, 자매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근친상간 금기로 인한 성적 불능을 초래해 뒤에 친한 친구로 하여금 자녀를 낳게 했다. 소심하고 온순하며 내성적인 소년이었던 그는 가정교사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14세가 되었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포병 학교에 보내어졌다. 1833년 초 소위로 임관되어 폴란드의 포병 여단에 배치되었으나 2년 뒤 21세에 제대한 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1836년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바쿠닌은 자유가 도덕법의 가장 높은 표현이라고 믿고 무한한 자아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의식을 향해 노력하는 것으로 본 피히테의 철학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1836년 피히테의 『학자의 소명에 관한 강의』를 번역했다. 그는 또한 실재가 이성적이라고 주장하고 반대의 변증법적 화해 속에서 정신의 전개와 실현으로서 역사를 제시한 헤겔 철학에 도취했다. 그는 1838년 헤겔의 『김나지움 강의』를 번역하고 서문을 썼다. 이는 러시아어로 번역된 헤겔의 첫 책이었다. 

 

감상적 이상주의자(바쿠닌) vs 헛되고 사악한 자(마르크스)

빌헬름 바이틀링은 독일 유토피아 평등주의 사회주의자다. 그 또한 바쿠닌과마찬가지로 마르크스에 의해 비판을 많이 받았다. 사진=위키미디어

모스크바에서 5년을 보낸 후, 그는 1840년에 베를린으로 가서 헤겔주의를 공부했다. 그곳에서 급진적인 아놀드 루게와 친구가 되면서 헤겔 우파에서 좌파로 돌아선 그는 포이어바흐의 인류학적 자연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인류가 의식과 자유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한다는 유물론적이고 진보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였다. 또 바쿠닌은 러시아 망명자 서클을 찾았고, 나중에 젊은 바쿠닌을 모델로 한 소설 『루딘』을 쓴 투르게네프를 만났다.

1842년 작센의 드레스덴으로 가서 루게의 『독일연감』(Deutsche Jahrbucher)에 실은 ‘독일의 반동’에 대한 글에서 그는 추상적 변증법의 부정을 옹호하고 반대 세력 간의 화해를 거부하며 다음의 유명한 문구로 끝나는 혁명적 실천을 요구했다. “오로지 멸망시키고 소멸시키는 영원한 정신을 신뢰하지 않겠는가. 그것만이 모든 생명의 측량할 수 없고 영원한 창조의 근원이다. 파괴에 대한 열정은 동시에 창조적 열정이다!” 이 글은 당시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바쿠닌은 1843년 스위스의 취리히로 가서 재단사 빌헬름 바이틀링을 만났다. 독학으로 독일 공산주의자 된 바이틀링은 지상에 신의 나라가 임할 것을 예언한 일종의 원시 기독교를 전파했다. 1838년 ‘정의의 리그’라고 불리는 독일의 비밀 조직을 위한 최초의 공산주의 강령을 작성한 그가 “완벽한 사회에는 정부 없이 행정부만, 법 없이 의무만, 처벌 없이 교화만 있다.”고 한 말에 바쿠닌은 매료되었다.

1844년 초 파리에서 바쿠닌은 프루동을 만났고 그의 『재산이란 무엇인가?』(1840)를 읽었다. 바쿠닌은 프루동이 정부와 재산을 비판하고 공산주의의 권위주의적 위험과 무정부 상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보다 그의 자유 찬양에 더욱 감동했다. 뒤이어 만난 마르크스는 4년 더 어렸지만 바쿠닌은 그의 지성, 정치 경제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의 혁명적 에너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인식한 마르크스는 바쿠닌에 대해 ‘감상적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했고, 반대로 바쿠닌은 마르크스를 헛되고 멍청하며 사악하다고 여겼다. 프루동의 본능을 결여하며 독일인이자 유대인인 마르크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권위주의자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쿠닌의 철학은 프루동의 정치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추방, 투옥 그리고 비밀단체 결성

프랑스 2월 혁명은 의회 내 반대파가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해산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사진=위키미디어

인민을 섬기려는 바쿠닌의 불타는 열망에 처음 호소한 대의는 슬라브 해방이었다. 헤겔은 각 인민이 역사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바쿠닌은 슬라브인들이 구세계를 파괴할 때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모든 신선함과 자연스러움으로 슬라브족은 그가 싫어한 독일의 현학과 추위와는 정반대로 보였다. 

1847년 말 러시아로부터 폴란드의 독립을 촉구한 연설로 인해 그는 프랑스 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외교적 압력의 결과,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바쿠닌은 브뤼셀로 갔지만, 몇 달 후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즉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2월혁명을 새로운 사회를 만들수 있는 기회로 보고, 러시아와 함께 유럽이 연방 민주공화국을 형성해 혁명이 끝나기를 바랐다.

혁명은 몇 주 만에 독일로 퍼졌지만 바쿠닌은 중앙 유럽의 슬라브 민족의 동맹을 촉구했다. 그러나 1848년 프라하 폭동의 실패하고 1849년 드레스덴의 반란에 참여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바쿠닌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곧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측에 넘겨졌지만 결국 러시아로 추방되어 8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1861년 탈출했다. 

1864년 피렌체에서 바쿠닌은 소수의 남녀로 구성된 비밀 단체를 만들고 자신의 아나키즘 이론을 다듬었다. 이어 1866년에는 국제형제단의 원칙과 조직을 만들었다. 1867년 이탈리아를 떠나 주네브로 가서 제1차 ‘평화와 자유 회의’에 참석했다. 가리발디, 빅토르 위고, 게르첸, 존 스튜어트 밀도 참석한 그 회의에서 바쿠닌은 고무되었다. 이어 제2차 회의의 소수파들과 함께 바쿠닌은 국제사회민주주의동맹을 결성하고 1868년 여름에 인터내셔널 주네브 지부에 합류했다.

쥐라(Jura)의 시계공들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그에게 동조했다. 그의 이탈리아인 동지인 주세페 파넬리(Giuseppe Fanelli)는 스페인으로 갔고 곧 국제 최대 조직인 스페인 연맹을 바쿠닌의 집산주의 및 연방주의 프로그램으로 전환했다.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자에게 밀려난 바쿠닌과 그 동지들

바쿠닌은 마르크스를 사상가로 존경했다. 그러나 1872년 9월 인터내셔널 헤이그대회에서 바쿠닌은 마르크스파에 의해 추방됐다. 사진=위키미디어

혁명적 생디칼리슴 또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인터내셔널의 아나키스트들에게서 나왔지만, 바쿠닌이 ‘평화와 자유 회의’와의 제휴에 대한 즉각적인 제안은 인터내셔널 총회와 그것을 지배한 마르크스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자 바쿠닌은 14명의 동지들과 함께 인터내셔널을 떠났다. 이듬해 인터내셔널과의 제휴가 다시 거부된 후, 바쿠닌은 1869년 초에 공식적으로 동맹을 해체했지만, 스위스, 벨기에, 이탈리아 및 스페인에 그룹을 설립했다.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바쿠닌과 그의 지지자들 사이의 소란스러운 논쟁은 1869년 9월 바젤 국제회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국가의 집단 재산 소유권을 옹호하는 마르크스파는 '국가' 또는 '권위적 공산주의자'로 불리고, 노동자연합의 직접 소유권을 주장한 바쿠닌파는 '반권위적 공산주의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바쿠닌은 마르크스를 사상가로 존경했고 『자본론』 제1권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진정한 논쟁은 야심찬 개인(바쿠닌)과 권위주의적 개인(마르크스) 또는 음모와 조직 사이가 아니라, 혁명 전략의 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바쿠닌은 전 세계를 포용할 유럽 혁명을 선동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아나키즘을 혁명적 운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에서 세계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70년 초, 그는 오랜 친구인 게르첸이 차르와 러시아 귀족에게 개혁을 가져오도록 호소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특히 그가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국가를 거부하라고 간청했다.

러시아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 반란이라고 주장한 바쿠닌은 그 촉매제를 찾기 위해 세르게이 네차예프라는 젊은 혁명가와 접촉했으나 이는 그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뒤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서 표토르 베르크호벤스키(Peter Verkhovensky)라는 캐릭터에 영감을 준 네차예프는 권력에 굶주린 독재자로 이기주의적이고 무례하면서도 이상하게도 매혹적인 인물이었다. 바쿠닌과 네차에프는 1869년 테러 역사상 가장 문제가 된 문서 중 하나인 『혁명가의 교리 문답』을 썼다.

파리 코뮌
파리 코뮌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 존재했던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였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만 유지됐다. 사진=위키미디어

프랑스 제2제국이 몰락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된 후, 바쿠닌은 1870년 9월 자신의 은밀한 동맹 회원들과 함께 리옹으로 가서 혁명적 공동체 연맹으로 이끄는 봉기를 촉발하려 하면서 이듬해 봄 파리 코뮌으로 절정에 달하게 될 혁명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리옹 봉기가 무너진 후 바쿠닌은 절망했지만 19세기 최대의 도시 봉기였던 1871년 봄의 파리 코뮌은 일시적으로 그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파리 코뮌도 두 달 만에 무너졌다. 게다가 1872년 9월에 열린 인터내셔널 헤이그대회에서 마르크스파에 의해 바쿠닌은 추방되었다. 이어 이탈리아로 가지만 그곳 아나키스트들과도 사이가 나빠져 결국 1876년 독일에서 병으로 고독하게 죽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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