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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0] 계몽주의의 아들, 바쿠닌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0] 계몽주의의 아들, 바쿠닌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7.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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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닌의 사상
바쿠닌의 초상화 사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의 초상화 사진=위키미디어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약한 한국이지만, 크로포트킨의 책이 여러 권 번역되었고, 고드윈이나 프루동의 주저들도 번역되었다. 그러나 바쿠닌의 저술은 전혀 번역되지 않았다. 아나키즘 역사에서 바쿠닌이 갖는 의의에 비추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 H. 카가 쓴 그의 전기가 일찍이 번역되고 최근 다시 번역된 점에 비추어봐도 이상한 일이다.

이는 다른 아나키스트들에 비해 바쿠닌이 체계적이고 일관된 사상가라기보다 대중운동가에 가까웠고, 그의 글은 혁명가로서 활동의 일부였으며 다양한 청중을 위해 작성된 혼란스러운 설명이 대부분이었던 탓도 있다. 그의 삶처럼 그의 글에도 모순이 많다. 즉석에서 허겁지겁 쓴 글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글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도리어 혁명운동의 와중에서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하여 순간적인 흥분 상태에서 쓰인 만큼 그의 글에는 그의 개성과 현실감각이 녹아있다. 즉 책상에서 쓴 탁상공론과는 철저히 무관했다.

글의 모순이나 부조화도 그런 성격에서 나온다. 또한, 대부분의 글이 미완성인 점도 혁명운동 도중에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고나성과 논리성이 떨어지지만 반면 진실성과 설득력이 있다.

 

혁명을 가로막는 것은 중간계급이다

헤겔 철학에서 출발해 무신론자가 된 점이 초기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공통되는 부분이었다. 시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은 젊은 시절 헤겔 철학에 심취한 철학적 관념론자였으나 1840년대 초반부터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로 바뀌었다. 이처럼 헤겔 철학에서 출발하여 무신론자가 된 점이 초기 마르크스와 공통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달리 바쿠닌은 미신적인 농민들이 소외될까 두려워해 무신론이 국제사회운동의 기본 원칙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쿠닌은 종교적 신념을 지상에서의 억압적이고 비참한 삶의 불가피한 결과로 인식하면서 그 형이상학적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종교에 대한 헤겔좌파의 비판을 발전시켜 포이어바흐처럼 종교적 천국은 신이 깃든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신성을 위한 인류의 궁핍화, 노예화, 소멸’인 모든 종교 체계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한 바쿠닌에 의하면 신의 관념은 인간의 이성과 정의의 포기이고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부정이며,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필연적으로 인류의 노예화를 초래한다고 봤다. 

그러나 바쿠닌은 포이어바흐와 같은 기계적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는 진화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물질세계의 점진적인 발전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수한 것으로,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완전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과 사회 모두에서 반대 세력의 충돌을 통해 발생하는 변화를 본 점에서 변증법의 옹호자였다. 변증법에 따라 정치적 현실을, 부정의 가능성을 갖는 대립 개념들의 모순에서 나오는 투쟁에 의해 발전하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모순이야말로 자유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혁명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노골적이고 공공연한 반동이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힘들의 반정립 작용을 왜곡하는 중간계급들이라고 본 바쿠닌은 그 중간계급이 역동적 대립을 약화시키고 현존 질서를 영구화하며 진보를 억제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바쿠닌이 역사 변동의 핵심으로 보는 부정, 즉 창조적 파괴를 가로막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소외를 역사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마르크스와 달리, 바쿠닌은 생명을 본질적인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부정을 생명운동의 원리로 보면서 통일이 아니라 현실의 영원한 변화를 추구한다. 

 

사탄은 최초의 자유사상가, 세계의 해방자 

마르크스에게는 과학이 사회를 조직하는 데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이 같은 생각이 생명을 결여한 것이라 봤다. 사진=위키미디어

이처럼 생명을 찬양하는 바쿠닌에게 과학은 불신의 대상으로 생명과 대립한다. 여기서 그 이율배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를 배제하는 선택이 당연히 요구된다. 이 점에서도 바쿠닌은 생명이 아니라 지식을 앞세우는 마르크스와 대립한다. 바쿠닌이 보기에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마르크스는 생명을 결여하는 것으로, 인간을 과학적으로 지배하려는 이념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에게는 과학이 사회를 조직하게 되고, 사회는 과학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에서 내려온 법칙의 합리성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회는 지식이라는 미신에 빠져들게 된다고 바쿠닌은 비판한다. 그러나 바쿠닌이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하거나 과학의 중요성을 몰각한 점이 아님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가 중시한 것은 사유를 존재로부터 분리해서는 안 되고, 생명이 항상 사유에 앞선다는 점이었다.

자연에서 인간을 분리시키려는 모든 이원론을 거부하는 바쿠닌은 인간은 자연과 하나의 실체를 형성하고 인간 종은 성욕과 굶주림이라는 두 가지 기본 욕구를 가진 다른 종들 중 단 하나의 종일뿐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인간 세계가 동물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라고 주장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반항하려는 욕망이라는 두 가지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또한, 바쿠닌은 인과적 자율권력이라는 절대적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면서도 ‘의식적 자기결정’이라는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 유일하게 자신의 지능에 따라 본능적 충동을 수정하고 자신의 필요를 조절하려는 의지를 개발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점에서 그는 계몽주의의 아들이다.  

그에 의하면 여호와는 사람이 무지하고 순종적인 ‘영원한 짐승’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지만, 사탄은 그에게 불순종하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촉구했다. 따라서 사탄을 ‘영원한 반역자, 최초의 자유사상가이자 세계의 해방자’라고 본 바쿠닌은 일반적으로 동물의 생명력과 존엄성은 반항 본능의 강도로 측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반란의 여신’이 ‘모든 자유의 어머니’라고 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자신의 자유와 인산성을 빼앗아야”

크로포트킨. 사진=위키미디어
크로포트킨. 사진=위키미디어

인류가 반란을 일으키고 다른 동물 종들로부터 떠남에 따라 인간은 더욱 완전하고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더욱 개인화되어 가장 완전하고 놀라운 개성을 나타낸다고 본 바쿠닌은 개인의 완전한 해방을 의식의 성장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역사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생각하고 반항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인간은 거의 전적으로 환경, 역사 및 사회의 산물에 의해 형성된다고 본 바쿠닌은 사람들의 공통의식을 형성하는 사상과 인상을 주는 것은 사회라고 본다. 도덕적 성향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간은 이기적이거나 사교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타고난 도덕적 특성은 아니라고 본 바쿠닌은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사회적 전통과 교육의 결과라고 보지만 인간은 환경의 영원한 희생자는 아니라고 한다. 즉, 발달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 종과 달리 지구의 대부분을 변형시키고 인간 문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본 바쿠닌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자신의 자유와 인간성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에콜로지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바쿠닌의 아나키즘에는 자연파괴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다. 이를 그가 19세기의 인간이었다는 이유에서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와 달리 페테르 크로포트킨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에콜로지스트는 이미 19세기에 환경파괴의 위험을 지각했다. 바쿠닌은 ‘인간’이라는 추상화로 당시의 습성 속에 있는 인간종을 지칭하지만, 그는 자신이 단순히 원자화된 생물이라고 믿지 않았다. 실제로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가장 사회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바쿠닌은 루소가 원시인을 고립되어 사는 자급자족 개인으로 묘사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다. 사회는 인간 존재의 기초라고 본 바쿠닌에 의하면 개미가 개미집에서 태어나거나 벌이 벌집에서 태어나듯이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생각, 말, 의지보다 앞서 있으며 우리는 오직 인간화되고 사회에서 해방된다. 사회 밖에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는 유일한 존재인 자신을 의식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지도 못한다.

사회는 또한 우리의 발전에 필수적이다. 첫째, 도덕의 기초는 사회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정의를 지키는 도덕법칙은 사회의 창조물인 사회적 사실이다. 둘째, 인간은 집단 노동을 통해서만 외부 자연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개인을 통해서만 개인의 자유와 인격을 실현할 수 있다. 넷째, 연대는 인간 본성의 기본 법칙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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