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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말들: 말과 사회사
사라지는 말들: 말과 사회사
  • 최승우
  • 승인 2022.07.22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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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지음 | 현대문학 | 424쪽

2020년 1월호부터 2021년 12월호까지 『현대문학』에 총 23회에 걸쳐 절찬 연재되었던 유종호의 에세이 『사라지는 말들-말과 사회사』가 출간되었다.
영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로서의 지성과 냉철함으로 변함없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가 이번 저서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사회 변화의 일환으로서의 ‘어사語史’이다. 해방 전 입학해 태평양전쟁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 때 6·25를 맞는 등 유례없는 변화와 변전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저자는 사회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말이고, 언어야말로 인간 이해의 열쇠라 정의 내리며 “이제는 옛말이 돼버린 듯한 어사를 검토해본다는 것은 내게는 말을 통한 잃어버린 시간의 탐구요 많은 동반자를 희구하는 사회사적 탐방이었다”고 소회를 밝힌다. 어사와 그 쓰임새의 변화를 사용 현장의 생생한 실례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추적해나가는 이번 저서는 “한평생 경험의 어휘사전”(김화영)이라 할 수 있다.

‘설은살’에서 ‘사바사바’를 지나 ‘오만 정’에 이르는 207개의 표제어,
정지용에서 시작해 보카치오, 프루스트를 거쳐 슈테판 츠바이크에 이르는
100여 명의 언어 마술사를 만나는 시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어사는 무려 207개에 이른다.
‘설은살’은 동지섣달에 태어난 아이의 나이, ‘오진살’은 정이월에 태어난 아이의 나이를 뜻한다. ‘말광대’는 사전에는 ‘말을 타고 여러 재주를 부리는 광대’라고 풀이되어 있으나 저자가 경험에서 얻은 뜻은 곡마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루갈이’란 소가 하룻낮에 갈 수 있는 논밭의 넓이이며, ‘호습다’는 사전의 정의와는 조금 다르게, 어릴 적 기차나 자동차가 움직일 때의 별난 느낌 혹은 즐거운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다. ‘명일’은 연중 특별히 유념해서 지켜야 하는 날로 명절과 동의어이고, ‘층하’는 갑질의 동의어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망골’은 약간 모자란 듯하면서 주책없는 언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처럼 저자가 소개하는 207개의 단어는 이제는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는 단어들로 대부분 우리가 폐기해서 잊힌 혹은 잊히면서 사라져가는 모어母語 중의 모어가 대부분이다. 저자는 세상의 변화에 의해서 폐기되고 잊히고 낯설게 된 이 언어들을 설명하기 위해 발생과 기원, 역사적인 함의,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사용한 용례, 사회 변화에 따른 의미의 변화 과정, 현재의 대체된 어사까지를 꼼꼼하고 세밀하게 서술한다. 게다 실생활 용어뿐 아니라 정지용 김동인 김유정 윤동주 이문구, 제임스 조이스 투르게네프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의 동서양을 막론한 작가들의 작품 안에서 어떻게 쓰여졌는가의 용례까지를 두루 살피며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시 소설 평론 에세이 여행기 설화 민요 그리스신화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적 고찰까지를 총망라한, 가히 독보적이고 방대한 자료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사로운 경험이지만 20세기 우리 시편을 통해서 많은 귀화 화초를 알게 되었다. 정지용의 달리아, 김기림의 튤립, 김광균의 카네이션, 칸나와 아네모네, 이한직의 아마릴리스, 김수영의 글라디올러스, 박인환의 재스민, 조병화의 베고니아로 이어지는 꽃들은 실물보다 이름을 먼저 알게 된 경우이다.”(382쪽)

또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 특유의 번뜩이는 촌철살인으로 독서의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철들자 망령’이란 것이 있다. 다섯 글자로 된 지상 최고의 간결한 인간론이라 생각한다. 젊어서는 철이 안 나 지각없는 언동을 일삼다가 겨우 철이 났나 싶으면 이내 망령을 부린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생론이기도 한데 우리 사회에선 특히 정치인의 경우에 유념해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분야의 경우엔 이렇다 할 영향력이 별로 없다. 당사자의 불행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모르는 철부지와 노망 든 화상이 우리 사회를 운전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다가도 섬뜩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47-148쪽)

이쯤 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박람강기에 더하여 실증적이고 세밀한 관찰, 쏠림 없는 균형감각과 적확 유려한 서술”(김화영)이라고 평가받는 이 저서를 집필한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저자가 밝히는 출간의 소회는 의외로 단순하다.

“칠판을 향해 앉아 있기를 대충 스무 해, 칠판을 등지고 서서 허튼소리 하기 마흔 해를 넘”긴 노비평가는 고령 세대와 젊은 세대의 일상어가 서로에게 외국어가 된 지금, “관”은 알아도 “널”은 모르는 독자들에게도 “쉽게 쓰인 이 책이 젊은 세대에게 우리말 이해와 사랑의 계기”가 되며,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다가가길 바랄 뿐이라고 소망을 내비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을 통한 역사의 복원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으로서 해방 전후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천착해온 저자는 이번 저서를 통해 다시 한 번 말을 통한 역사의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말은 그 자체로서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상 모두를 담고 있고, 같은 말이라도 시대에 따라 또는 생활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에서 말의 의미 못지않게 주목하는 건 바로 그 말이 사용된 환경이다. 그러다 보니 저자의 어린 시절인 해방 전후의 역사가 오롯이 담길 수밖에 없다. 당대의 생활환경과 의식 수준 또한 저자의 날카롭고도 위트 있는 시선 속에 잘 녹아 있기도 하다.

각종의 '어휘'들을 다룬 글을 통해 우리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또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하는 언어의 속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지난 시대의 자화상을 한눈에 보게 된다. 더불어 과거뿐 아닌 우리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하나의 시선을 갖게 된다는 것, 그것이 이 저서의 미덕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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