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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스의 원리가 말하는 대안의 정치
에토스의 원리가 말하는 대안의 정치
  • 송석랑
  • 승인 2022.07.28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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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㉑_송석랑 목원대 창의교양학부 교수
자크 랑시에르. 사진=위키피디아

크고 작은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담론과 실천들이 우리사회의 일상 도처에서 폭발하고 있다. 이념이 쇠락한 자리를 실존의 욕망이 대신하며, 일상의 모든 것이 정치화되었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들의 표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분명 해방의 사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에는 우리사회의 바람직한 공존의 전망을 어렵게 만드는 정치의 퇴락이 섞여 있다.
 
그 해방의 사태에 섞인 정치의 퇴락은 유토피아적 논리가 제공했던 신념을 상실한 정치비관주의 내지 무정부주의적 체념의 정서를 이른다. 실제로 그 사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 체념의 정서를 반증하는 숱한 선동, 맹신의 공감, 혹은 적대진영에 대한 반감이 빚는 분열과 대립의 갈등 내지 불화로 소란하다. 진보의 전망을 달리 정립치 못한 채 실존의 욕망 수준에서 이념적 헤게모니를 ‘변주/반복’하는 이 퇴락의 현상은 ‘유토피아정치의 몰락’을 극복치 못한 정치의 위기, 정치적 상상력의 무능을 가리킨다. 

그 무능의 위기를 벗고 정치의 퇴락을 차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토피아정치로의 회귀가 아니다. 유토피아적 조화의 윤리는 정치에서 무정부주의적 체념의 정서를 제거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다시 과거의 ‘숨 막히는’ 이념의 구속과 대립, 환상의 폭력을 겪어야한다, 문제는 유토피아적 ‘조화의 윤리’가 실존의 배타적 욕망의 연대로 반복되는 위기의 국면을 기회로 역전시킬, 그래서 그 ‘억압된 것의 표출’이라는 해방의 기미를 온전히 전유할 방도다.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과 정치학”(esthetique et politique)은 ‘분열과 대립의 갈등을 용납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조화의 윤리’가 아니라 ‘분열과 대립의 갈등을 가로지르며 그것을 “동의와 이의의 역학 확립”의 수준에서 포용하는 에토스의 원리’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유력한 대안의 정치를 말한다. 이 정치로써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기존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대신할 어떤 새로운 유토피아적 정치체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지향했던, 그러나 그 실재성을 두고 서로 다투었던 정치과정, 즉 민주주의의 혁신이다. 

“실재의 민주주의는 비민주주의의 별칭”이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과 통하는 이 혁신의 요체는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화의 원리’가 아니라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의 원리’다. 명료한 척도 없이 조화를 추구하는 이 공존의 에토스가 하필 미학을 통해 이야기 되는 것은 그의 철학이 미학을 심장으로 취한 철학, 즉 현상학의 ‘근원적 감각’에 닿아있음을 뜻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근원적인 감각의 ‘지향성’이 아니라 ‘힘’이다. 

그의 “미학과 정치학”이 ‘미학으로서의 현상학을 통한 정치학’이 아니라 ‘미학으로서의 현상학인 동시에 정치학’으로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모든 억압의 증후는 감각(보고, 듣고, 말하는 방식의 존재론적 원형)에 있고, 해방의 단서도 거기에 있다. 그 증후는 “감각의 분배”(partage du sensible)이며, 단서는 이 분배의 질서를 깨뜨릴 ‘감각의 힘’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적 질서를 교란하는 정치적 주체화”의 작용, 즉 감각의 분배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된 “근원적인 불화”(mesentente)의 과정을 통해 성립하는 “합의”(consensus)를 가리키는데, 이 합의는, 할당된 질서에 균열을 내는 감각의 힘을 통해 세상에 대해 새롭게 표현한 내용을 '공적 영역'의 문제로 끌어들여 논쟁을 유발, 확립된 정치의 제도를 재구성해나가는 실존론적 저항의 시간에서 생긴다는 점에서 ‘배타적 적대성과 폭력성을 숨긴 유토피아적 조화’와는 전혀 다른 내재적 조화로서, 이를테면 조화의 불가능성 때문에 가능한 조화의 에토스가 된다.

정치의 퇴락에 순응할 때, 정치의 리더십도 퇴락한다. 우리가 지향할 정치, 민주주의의 리더십은 실존의 욕망을 통제하는 자의 것도, 그 욕망의 배타성에 휘둘리는 자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빙자한 '위선의 열정'을 넘고, 무정부주의적 소란을 감내하되 감각의 분배 질서를 거부하는 정치주체들, 그 “몫 없는 자들”의 실존적 욕망(감각의 힘)을 포착하여 “합의”로 이끌어가는 수고의 반복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실현해가려는 민주주의자에게 가능할 것이다. 

 

송석랑 목원대 창의교양학부 교수
한국외대에서 철학을 전공(학사, 석사)하였고, 충남대 대학원에서 실존현상학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역서로 『인문예술, 세계를 담다』(공저 2022), 『프랑스철학의 위대한 시절』(공저 2014), 『현상학, 시적감각의 지성』(2012), 『언어와 합리성의 새 차원: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2004), 『정신과학 입문: W. 딜타이』(역서 20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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