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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시와 말·문자·노래의 프랙탈
한국 근대시와 말·문자·노래의 프랙탈
  • 최승우
  • 승인 2022.07.29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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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 지음 | 소명출판 | 844쪽

한국 근대시사를 체계적으로 논하다
“아담과 이브가 레치타티보로 대화했다면, 우리 고대의 시가 「황조가」의 ‘가(노래)’가 바로 그런 레치타티보식의 말이 아니겠는가?”, 즉 말과 문자, 시와 노래, 말과 노래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인 말, 오페라의 ‘레치타티보(Recitativo)’ 같은 언어의 존재가 시양식에 고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같은, 다소 엉뚱하고 생경한 의문이 이 책을 기획, 저술하게 된 동기이다. 시쳇말로, 시와 음악 간의 ‘대화 및 융합의 관점’이 이 책의 기본 바탕인데, 저자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인 ‘음악으로부터의 언어’라는 관심이 이 책을 저술하는 데 동력이 되었다.

이 책은 한국 근대시사의 가장 오래되고 해묵은 논점들을 소환, 새로운 관점에서 재논의함으로써 근대시사의 쟁점들을 현재적 관심의 선반에 올려놓고 있다. 한국 (근)현대시 연구의 대상시기가 1990년대 이후까지 올라온 상황에서 근대시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의 고루함을 새삼 예상할 수 있음에도, ‘자명해서 자명성을 상실한’ ‘조선어구어한글문장체’ 문제를 근대시의 핵심으로 전제하고 근대시사의 기원 및 주요 쟁점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그간 근대시사상 핵심 논점은 근대시의 기원 및 전통단절론, 자유시 양식론 및 상징주의시의 모방, 이식론, 정형시-자유시-산문시의 단계적 이행론 및 양식론, 언문일치론, 사조론, 문단론, 운율론, 근대성론 등인데, 이 책은 한국 근대시사의 전개과정에서 무엇보다 핵심적인 조건이 ‘조선어구어’이며 이를 신문, 잡지 등 근대적 매체에 어떻게 문자화, 쓰기화, 노래양식화 할 것인가의 모색과정이 곧 근대시사의 도정임을 해명하고 있다. 서구적 입론이나 이론에 기대기보다는 육당으로부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신문, 잡지 등에 발표된 시양식의 실제 판면(기사법(記寫法))을 실증적으로 추적, 조사하고 시양식론, 비평론, 시담론 등의 근대자료를 광범위하게 강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화, 논리화함으로써 결론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것이다.

조선어구어체에 기반한 언어양식으로서의 한국근대시
이 책의 제목, “한국 근대시와 말, 문자, 노래의 프랙탈-문자화, 기사법(記寫法) 그리고 조선어구어한글문장체 시가 있었다”는 언어, 문자화(쓰기), 미디어 등이 근대적 문예양식의 필수적인 조건임을 전제한 의미를 담은 것으로, ‘양식의 의지’를 ‘인간의 의도’보다 우선적으로 놓는 이 책의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선어구어에 기반한 언어양식으로서의 한국근대시는 신문, 잡지 등의 미디어적 조건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한국 근대시는 우리말의 ‘노래성(리듬, 음향, 음조)’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전통 시가양식과의 접점을 확보하게 되고 그 노래성을 지면(미디어)에 어떻게 기사(記寫)할 것인가의 방법이 곧 근대시의 작법이자 문자화(쓰기)이다. 근대시사는 전통적으로 계승돼 온 ‘말의 노래’의 프랙탈적인 순환을 증거하면서 동시에 시양식이 산문양식으로부터의 차별성과 고유성을 확보하는 도정이기도 했다. ‘말의 노래’로서의 시가양식은 전통단절론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과 동시에 동서고금 시양식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언어’ 문제란 근대시의 핵심조건인 ‘조선어구어’를 근대시의 핵심사항으로 본다는 것이다. 시양식에 있어 핵심조건인 언어문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근대성론의 ‘근대의식’이라는 항에 가려 그동안 그 중요성이 간과돼 왔다. 각 민족 및 인종에 따라 갈라지는 조건인 ‘언어’ 문제는 양식의 이식, 모방에 장애요인이자 새롭게 양식을 창안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시형은 모방해도 시는 모방할 수 없다’는 초창시대 시담당자들의 시각은 우리말, 조선어구어라는 이 언어적 조건으로 인해 새로운 근대시의 양식이 창안될 수밖에 없던 사정을 설명해준다.두 번째, ‘시가(노래)성’의 문제. ‘시가:시’는 ‘전근대시:근대시’, ‘정형체시:자유시체’의 이항대립적 관점과 평행하게 적용돼 왔다. 근대시의 출발을 ‘음악(노래)으로부터의 탈출’에서 찾은 논점을 이 책은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노래체(시가체)’는 시양식의 본질이며 이는 근대시양식을 고민했던 초창시대 시담당자들의 인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당대의 실증적인 자료들이 정형체시를 자유시체에 비해 전근대적이거나 덜 진화된 양식이라 해석, 평가하는 것의 오류를 확인해준다. 시가와 시, 정형시체와 자유시체, 가사와 곡 등의 이행대립적 분할 및 구분을 통해 근대시의 기원 및 양식론을 해명하기는 어렵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세 번째, 출판 미디어와 관련된 인쇄리터러쉬(print literacy) 문제. 근대시사에 있어 신문 및 출판의 중요성을 이 책은 지적한다. 근대시의 현존은 결국 신문, 잡지 등의 판면에 실재화(인판화)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기사법, 단구법, 문장부호법 등은 시가양식이 산문양식으로부터의 차별성과 고유성을 증거하는 핵심 기사법이다. 개행이 시양식의 조건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은 무엇보다 발표지면의 물리적 가시적 환경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정형시체적인 외형 및 구어적 리듬을 비정형화, 탈정형화함으로써 자유시체로서의 양식적 외형을 담보하려는 노력이 ‘자유시’의 물리적 실재로 나타난다. 더욱이 문장부호는 노래, 음성, 음향 등의 시 고유의 특징을 문자화 한 것이다. 이 책은 서구적 입론이나 이론적 탐구로부터 출발하기보다는 실재하는 물리적, 가시적 인쇄리터러쉬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한다.

프랙탈, 시양식의 본질적 고유성
근대시는 결국 우리말, 조선어구어의 음악, 음향, 리듬 등을 문자로 재현하는 문제, 곧 한글문장체로 이 음악적 조건을 어떻게 문자화, 쓰기화화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근대시의 기획은 ‘조선어구어의 문자화’라는 측면에서 전통시가의 음악적(시가적) 유산의 계승과 분리될 수 없고 리듬론, 운율론 등도 결국 우리말의 자연스런 음악성에서부터 추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대시의 기원을 굳이 서양시의 수용/모방론으로 환원시킬 이유를 찾기 어렵다. 시가성의 양식적 계승이라는 관점은, 정형시로부터 자유시를 거쳐 산문시에 이르는 근대시의 진화론적 구도를 전복한다. 따라서 우리말의 낭영성, 자연스런 음악성이 잘 살아있는 시에 근대시의 핵심이 있고 그것은 김소월, 정지용 등의 우리말 시의 최고봉에 있는 시인들의 시가 증언해주고 있다.

이 책이 지향하는 관점은 저자가 책 말미에 부쳐둔 ‘개념정리’ 항에서 확인된다. 초창시대, 스크라이빙(scribing), 조선어구어한글문장체, 문자시(poetry as the letters), 기사법(記寫法), 인쇄리터러쉬(print literacy), 수행성(performance) 등의 개념어들은 이 책의 중요한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무런 것도 지시하지 않고 아무런 것도 표상하지 않는 음악적인 말의 실체는 조선어구어이며 그것이 한국 근대시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이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근대시는 우리말, 조선어구어의 내적 의지 그대로 진행되어 왔으며 그것은 ‘노래’의 프랙탈(fractal)적인 반복이라는 점에서 전통 시가양식과 접합된다. 원환회귀를 통해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동서고금 시양식의 본질적인 고유성이 우리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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