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6:55 (금)
호혜성 없는 자유주의 병폐···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 극복
호혜성 없는 자유주의 병폐···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 극복
  • 최승우
  • 승인 2022.08.23 0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⑯ 송지우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달 30일 송지우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가 「자유주의에서의 평등」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17강은 김현주 원광대 교수(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의 「근대 동양에서의 자유: 민권과 국권」, 제18강은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의 「자연과학과 자유: 열역학적 자유」, 제19강은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의 「동양의 환경철학」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자유주의는 기저 인간관에서 이미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게 아니라 연동되는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상충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동행한다.”

‘자유와 평등은 상충하는 가치이다’라는 명제의 전파는 우리 시민교육의 흔하고 심각한 오류이다. 수많은 학생이 일종의 도식으로 학습하고는 하는 이 명제는 사실 걷잡을 수 없이 애매하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자유를 말하는지, 어떤 이들 사이 무엇의 평등을 말하는지, 이 각각의 가치를 증진할 이유를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이 명제는 그 참, 거짓이 달라진다. 해석과 구체화 없이 이 명제는 무용하다. 바로 그런 해석과 구체화를 체계적으로 제안하는게 적어도 근대 이후 정치철학의 상당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자유주의의 주요한 한 조류에 따르면, 이 명제는 ‘자유’와 ‘평등’을 각각 의미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또는 우리가 관심 가져 마땅한 방식으로 해석할 경우 거짓이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관심 증대와 공정 담론의 부상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은 면이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탐구는 현재 우리에게 유용하다. 자유주의 철학의 기본적 도덕 단위는 개인이다. 자유주의에서 정치·사회 규범의 정당화 대상은 궁극적으로 개인이다. 예를 들어 ‘이 규범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거나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의 총합을 극대화하는 규범이다’는 식의 정당화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는 부족하다. 국익 증진이나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다 합쳐서 양을 늘리는 게 각 개인에게 왜 중요한지가 규명되어야 한다. 

송지우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는 "물질적 불평등이 사회적 지위의 부당한 격차와 낙인찍기로 이어질 때 한 가지 대응은 물질적 불평등과 지위 불평등의 고리를 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개인은 자유롭고 서로 평등한 존재로 이해된다. 이는 근대 사회계약론 전통을 계승하는 인간관으로, 홉스, 로크, 루소, 칸트와 같은 근대 계약론자들에게 국가의 정당성을 정치적 과제로 촉발시키는 전제이다. 이들의 이론에서 국가 정당성의 문제는, 저마다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권력의 간섭을 허용하고 그 권위를 인정해야 마땅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다. 롤스는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따지기보다는 존재하는 국가의 정의로운 구성을 고민한다. 그는 호혜적 관계 맺음을 도덕성과 합리성의 역량을 지닌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들에게만 가능하고 또 적합한 것으로 보는 칸트의 실천철학을 계승한다. 

롤스가 정의를 공정한 협동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공정으로서의 정의’라고 불리는 그의 정의관에서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 호혜성이다. 이 정의관에서는 협동의 조건이 공정하려면 호혜성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호혜성은 규칙과 절차를 준수하면서 협동에 참여하여 자신의 적절한 몫을 한 구성원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몫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

호혜성이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이 호혜적 사회 협동을 목표로 하고 이를 다시 정의의 두 원칙을 구현하는 기본 구조의 필요성으로 해석하는 반면, 호혜성 기준의 충족을 목표하지 않는 자유지상주의는 “지나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가 호혜성의 관점에서 공정한 사회 협동체라면, 부정의한 사회에서는 호혜성의 기준이 무너져서 공정한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정의는 이들이 그럼에도 협동체의 규칙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여전히 시민적 책무를 다하면서 제도 안에서 제도 개선을 시도해야 마땅한 범주, 즉 시민적 참을성의 임계점을 규정한다.

한편 불평등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조치 가운데에는 평등주의적 이유에 기반하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지구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부유한 이들로부터 자원을 모아 빈곤한 이들에게 전달하는 정책을 실현하면 결과적으로 지구 불평등이 줄어들 수 있겠지만, 이때 작동한 이유는 절대적 빈곤 해소의 이유이지 상대적 격차를 줄이는 평등주의적 이유는 아니라는 게 스캔런의 현재 견해이다. 

적어도 우리 시대에 도덕적 평등이 노골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는 국가 단위 사회는 없을 것이다. 또한 통상 평등주의를 둘러싼 이견은 물질적 불평등을 언제, 어떻게 제한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지 도덕적 평등을 두고 전개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인간관이 전제하는 도덕적 평등이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위계의 타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기본적인 도덕적 평등의 아이디어 수용의 증가와 이 아이디어가 포괄하는 사람들의 범위의 확대는 어쩌면 지난 몇 세기 동안 가장 중요했던 형태의 도덕적 진보일지 모른다.” 

경제적 불평등이 여타 사회적 위계상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한 이들은 굴욕적인 지위의 차이를 겪어야 하기도 하며, 이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건강한 자존감 형성을 방해한다. 경제적 격차에 따라 이처럼 지위의 차이가 발생하는 사회에서는 또한 사회적 연대가 약해지고,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들 간에 적합한 관계 맺음인 호혜적 관계가 어려워진다. 더욱이 스스로 가치를 사회경제적 위계에서의 위치로 파악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가치로부터 소외되고, 사회경제적 위계에서 좀 더 높은 위치를 점하고자 다른 사람들에게 종속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등 자유를 저버릴 유혹에도 취약해진다.

물질적 불평등이 사회적 지위의 부당한 격차와 낙인찍기로 이어질 때 한 가지 대응은 물질적 불평등과 지위 불평등의 고리를 끊는 것, 즉 돈이 없어도 충분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을 향한 노력의 일부로 롤스는 평등한 시민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시 루소에게 이어받는 이 주장은,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가장 중요한 사회적 지위로 인식함으로써 경제적 부침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의 근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바라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평등이 존재한다.

자유주의는 기저 인간관에서 이미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게 아니라 연동되는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일방적 통제, 즉 자유의 불평등이 곧바로 문제로 포착되는 것이다. 둘째, “자유 그 자체”에 대한 제한을 문제시하는 관점에서 멀어지고 기회 차단 반대의 이유, 통제 반대의 이유와 같은 구체화 된 자유의 이유를 명시하는 관점에 가까워질수록, 해당 사례를 ‘자유 대 자유’의 까다로운 대결로 보는 이해도 힘을 잃는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상충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동행한다고 보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이론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통찰들이 좀 더 널리 알려지면, ‘자유와 평등은 상충한다’는 식의 주장이 손쉽게 제기되고 받아들여지는 관습은 소멸할 것으로 기대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