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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나이트클럽, 인천·부산의 헤비메탈, 광주의 포크를 아십니까
유성의 나이트클럽, 인천·부산의 헤비메탈, 광주의 포크를 아십니까
  • 김학선
  • 승인 2022.08.26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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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어디서 왔니 ⑧ 한국 팝과 지역 씬

서울공화국 현실…한때나마 지역에 ‘씬’이 있었다
그 지역을 기록할 수 있다면 ‘장르’로 확장할 수도

대중가요의 역사와 문화를 현장감 있게 조명한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1960, 1970, 1980, 1990)가 화제다. 이 시리즈는 한국 팝에 대한 문화연구 측면과 K팝의 뿌리를 찾는 여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특히 『한국 팝의 고고학』은 공간을 중심으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통사적으로 엮어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에 책의 공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K팝 어디서 왔니’라는 제목으로 책에서 못 다한 얘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한다. 

1998년 <동아일보> 기사엔 “대전 ‘로데오거리’를 아십니까?”라는 문장과 함께 대전시 유성구 궁동 거리가 ‘압구궁동’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실 압구궁동이란 말은 대전, 특히 유성을 아는 사람에겐 그 전부터 익숙한 말이었다. 1990년 1월부터 실시된 유흥업소의 심야영업 금지 조치로 인해 서울의 수많은 야간업소가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흥했던 방배동의 카페 거리가 1990년대 들어 움츠러든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다.

업소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밤문화’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이런 심야영업 금지 조치는 큰 타격이 됐다. 그런 이들이 찾은 곳이 대전 유성이었다. 유성은 온천 때문이었겠지만, ‘관광특구’로 지정이 돼 이 조치에서 예외적인 곳이 됐다. 그래서 압구정동 등에서 1차로 놀던 이들이 11시 정도에 고속도로를 달려 유성에서 새벽까지 여흥을 즐겼다. 그래서 생겨난 별칭이 ‘압구궁동’이었다. 

대전 유성구 ‘압구궁동’의 ‘밤무대’ 음악가들

유성은 유흥의 거리였다. 수많은 네온사인과 호텔 나이트클럽 간판이 밤이면 더 빛을 발했다. 유흥이 있는 곳에 음악이 빠질 순 없었다. ‘생음악’을 연주하는 수많은 밴드가 유성의 호텔 나이트클럽 밴드에 섰다. 유명한 연주자도 있을 것이고, 평생을 무명으로 산 연주자도 있을 것이다. 유성의 이른바 ‘밤무대’ 음악가들 이야기만으로도 너끈히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팝의 고고학』 작업이 끝난 뒤에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정사보단 야사가 더 재미있는 법이다.

『한국 팝의 고고학』이 출간된 뒤 과분한 칭찬을 많이 받았다. <교수신문>을 비롯해 거의 모든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크게 다루어주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을 순 없다. 책이 너무 서울 중심적으로 쓰여 있다는 비판, 혹은 아쉬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특히 1980년대 편은 ‘장소’를 중심에 두고 써서 더욱 그렇다. 『한국 팝의 고고학』엔 신촌과 방배동과 이태원과 압구정동이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다른 지역은 아주 짧게 언급되거나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대전의 나이트클럽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외전처럼 이렇게 하나의 장소에 집중한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어졌다.

물론 서울은 가장 큰 음악 씬(scene)이 존재하는 곳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고 미래에도 변함은 없을 것이다. 아마 서울 이외 한국의 모든 지역을 다 합해도 씬의 크기는 서울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서울의 크기는 압도적이다. 결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서울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서울 이외의 다른 지역을 이야기하고 구성을 갖출 수만 있다면 역사는 더 촘촘해지고 짜임새 있게 될 것이다. 

인천과 부산의 헤비메탈을 상징했던 밴드 사하라와 스트레인저의 데뷔 앨범. 이들은 굳이 서울로 ‘상경’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사진=을유문화사

헤비메탈 팬을 들뜨게 했던 ‘인천과 부산’ 

가령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간 헤비메탈 음악이 큰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인천 헤비메탈의 맹주처럼 이야기되던 밴드 사하라의 보컬리스트 우정주는 왜 서울로 가지 않고 인천에서 주로 활동했냐는 나의 물음에 “왜냐하면 씬이 있으니까”라는 간단하지만 이보다 명확할 순 없는 답을 했다. 우정주의 말처럼 인천엔 인천만의 헤비메탈 씬이 있었다. 많은 밴드가 있었고 공연할 공간이 있었고 이를 향유해주는 팬들이 있었다. 

부산 역시 다르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부산의 헤비메탈 밴드들은 ‘부산 인베이전’이란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한때 서울의 헤비메탈을 위협했다. 굉장한 테크니션 연주자들이 등장했고, 서울과는 다른 스타일의 음악으로 헤비메탈 팬들을 들뜨게 했다. 인천과 부산은 서울공화국의 현실에서 한때나마 지역에서 ‘씬’이란 걸 만들었던 드문 몇몇 사례다. 이런 사례는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들려줄 수도 있다. 그렇게 한때 번성했던 인천의 씬이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부산에서 헤비메탈 음악을 했던 이들에게 악기 연주를 배운 이후 세대가 인디 씬에서 활동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다.

최유준과 장상은이 함께 지은 『모모는 철부지 - 전일방송 대학가요제의 기억』. 

1980년 전후 광주 지역의 포크 ‘씬’

광주에선 지역 포크 음악가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민중음악 진영으로 투신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때의 흔적은 지금 광주 사직동의 통기타 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광주의 이런 변화 과정에 대해 그나마 조금은 알게 된 건 『모모는 철부지 - 전일방송 대학가요제의 기억』이란 책을 읽고 나서였다. 1980년 전후 광주 지역의 포크 씬에 대해 다룬 이 책은 『한국 팝의 고고학』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좋은 예다. 『한국 팝의 고고학』이 과분한 칭찬을 받았지만, 최소한 광주에 대한 부분은 『모모는 철부지 - 전일방송 대학가요제의 기억』보다 더 세세할 수 없다.

이제 통사보다는 ‘미시’가 필요한 시점 아닐까

인천과 부산의 헤비메탈에 대해, 그리고 대전의 나이트클럽 씬에 대해 기록할 수 있다면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정리는 훨씬 더 풍성하고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꼭 지역이 아니고 장르로 확장할 수도 있다. 각자가 관심이 있고 애정을 가진 분야에 대해 파고들면 된다. 누군가는 한국에서 전자음악이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다루고, 누군가는 케이팝을, 누군가는 헤비메탈의 역사를 기록하면 된다. 다루는 폭은 좁아졌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한국의 대중음악사를 더 넓히는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이제 통사보다는 ‘미시(微視)’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더 작고 세밀하게 볼 것.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이번 호로 ‘K팝 어디서 왔니’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와 수고해 주신 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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