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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대의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착각이다
선거대의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착각이다
  • 유무수
  • 승인 2022.08.26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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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민중의 이름으로』 이보 모슬리 지음 | 김정현 옮김 | 녹색평론사 | 272쪽

민주주의도 끊임없이 방어하고 보호해야 한다
감시제도·협동적 시민의회·국민발안 등 활용을

선거 때는 민중의 환심을 얻기 위해 민중의 이익에 헌신하는 듯한 폼을 재다가 당선된 후에는 민중의 삶과 무관한 사리사욕, 당리당략, 정당의 배후조종자 사이에서 줄타기 하게 되는 선거대의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이보 모슬리는 “민중이 자신들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주권을 갖는다”는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아이디어는 표면적으로만 그럴 듯한 이야기이며 “대의제를 민주주의로 여기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선거대의제가 절대주의체제의 출현 가능성을 낮추는 것은 사실이지만 1800년 경 이전까지 선거대의제는 ‘소수에 의한 통치’ 또는 ‘과두정치’로 인식되고 있었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민주적’이라는 선전은 1800년대에 이르러 부유한 신흥 중산계급의 통치를 옹호하는 자들에 의해 조장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중’의 극히 일부에 한해서 투표가 허용됐지만 이런 나라의 엘리트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시스템이 ‘민주적’이라고 자처했다. 

미국에서는 목소리가 큰 소수 과격분자들에게서 대의제가 민주적일 수 있다는 독트린이 처음 나왔다. 선거대의제는 정확히 ‘데모크라시’는 아닐지라도 더 나은 형태의 정부이며 투표는 민주주의의 요소라고 주장하는 저서들도 출판됐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대표자들이 정당의 배후조종자들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다.

저자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대의 민주주의 신화는 “민중이 교육받지 못했던 시기에 안정된 중간계급 정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이 신화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이제 제거돼야 한다. “가난하고 다수이기도 한 자유인들이 통치할 때, 그런 정부의 형태가 민주주의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인정한다면 “대의 정부는 본성적으로 비민주적이다.”

루소는 애초에 대의제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민중은 자신을 대의(대표)하도록 허용하는 순간부터 자유롭지 않게 된다.” 토크빌은 가장 합리적인 정부는 “가장 정통하고 가장 도덕적인 사회계층이 이끄는 정부”라고 말했다. 선거의 상황에서 문제는 가장 도덕적인 사회계층에 속한 자들만으로 출마자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덕지수나 준법지수가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후보자들이 정당의 줄을 약삭빠르게 잡아서 출마할 수 있으며 그러한 때에 유권자들은 최선이 아니라 누가 덜 나쁜 차악인지를 고민하며 투표하게 된다. 그리하여 선거를 통해 차악이 득실대는 의회,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한 정부가 얼마든지 구성될 수 있다.

대표자들은 과연 민중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가?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한 계층에게 진실과 공정에 기초한 상상력은 나올 수 없다. 차악들이 권력을 잡고 국가발전보다 개인적인 야심과 진영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정책을 주무를 때 다수의 민중이 더 큰 부자유와 불평등의 혼란으로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저자에 의하면 민주주의도 끊임없이 방어하고 보호해야 한다. 저자는 좋은 정부를 위한 감시제도, 추첨에 의한 의회, 협동적 시민의회, 국민발안 제도 등 다양한 예시를 들면서 고유한 자치의 형태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중에서 감시제도는 책임을 확실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독선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의미하는 감시의 방기는 소수 엘리트주의 특권에 투항한다는 의미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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