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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인본을 외친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자유와 인본을 외친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 이용재
  • 승인 2022.09.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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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의회의 조레스 당의 조레스 노동자의 조레스』 노서경 지음 | 마농지 | 600쪽

개인을 중시하고 계급투쟁의 필연성도 믿지 않아
인종·민족주의적 차별과 제국주의적 지배에 반대

20세기 초 세계전란을 눈앞에 두고 평화를 부르짖다가 극우파에게 암살당한 행동하는 지식인. 노동해방의 대의에 헌신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회주의 정치인.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는 사후 한 세기가 지나 사회주의가 황혼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프랑스인들이 정치적 진영논리를 넘어 가장 흠모하는 위인들 중 하나이다. 프랑스 여기저기에서 조레스를 기념하는 길, 공원, 동상 따위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레스는 교과서나 위인전기는 물론이고 역사소설이나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조레스를 사회주의를 프랑스혁명을 거쳐 확립된 공화국 정신의 산물로 간주했다. 사진=이용재

프랑스의 ‘국민 영웅’ 조레스가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프랑스에서 추모 열기가 한창인 2009년에 국내에서 번역·출간된 『장 조레스, 그의 삶』 (막스 갈로 저, 노서경 역) 덕분일 것이다. 조레스 평전의 번역자가 이제 10여 년 연마와 내공을 더해서 본격적인 조레스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책은 사회주의자 조레스의 사상과 행적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이를 통해 프랑스 사회주의의 연혁을 되짚어보고 앞날을 조망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프랑스 현대사를 전공한 저자는 일찍이 조레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은 20년 전 박사논문의 복사판이 아니다. 600쪽 분량 묵직한 책에는 박사논문 이후 오랜 연구와 교육 활동 동안 차곡차곡 쌓인 저자의 경륜과 소양이 담뿍 배어있다. 치밀한 내용 구성은 물론이고 빽빽한 문헌 목록에는 조레스나 프랑스 정치사상사와 관련된 국내외의 연구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저자는 국내 연구자들과의 학술 토론을 거치면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줄곧 책의 구성과 내용을 반추할 기회를 가진 듯하다. 자주 프랑스를 찾아 연구생활을 계속한 저자는 국립도서관뿐만 아니라 사회당 산하 연구기관(L’OURS)과 사회박물관(CEDIAS) 등지에서 관련 자료들을 열람하고 모았으며, 조레스학회에서 전문연구자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책 속에서 드문드문 프랑스 사회주의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남다른 관찰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저자가 현장 연구자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얻은 생생한 정보 덕일 것이다. 긴 세월 성실한 연구가 책 한 권에 녹아있다. 

 

조레스 평전보다는 연구소로 읽히길 

저자는 이 책이 조레스 「평전」으로서보다는 「연구서」로 읽히기를 바란다. 평전은 인물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개입해 서사구조가 만들어지며, 그만큼 정서적 효과와 감흥을 더해준다. 반면에 연구서는 인물과 상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은 물론이고 자료 검증과 비판적 논증을 거치는 만큼 학문적 엄밀성을 담보한다. 물론 이 책은 관련 자료와 전거를 총망라한 오랜 연구의 결실이며, 무려 120쪽에 달하는 주석(註釋)이 붙은 엄밀한 학술 서적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의회의 조레스, 당의 조레스, 노동자의 조레스』라는 다소 고지식해 보이는 제목을 달아 놓은 듯하다.

하지만 서평자가 보가에 이 책의 특장은 바로 비판적 연구서이면서도 주관적 시선이 가미된 인물 평전으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는 데에 있다. 저자는 조레스에 대한 어떤 섣부른 평가를 삼가는 대신에 많은 연설문과 논설들을 직접 인용하는 방식을 통해 조레스의 ‘육성’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려한다. 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이 ‘이야기체(narrative)’로 전개되는데, 여기에 그 인물을 바라보는 저자의 ‘정서적’ 시선이 간간이 묻어나기도 한다. 저자 특유의 필치로 생동감을 더한 특색 있는 연구서이다. 

 

장 조레스(Auguste Marie Joseph Jean Léon Jaurès, 1859∼1914)는 프랑스 출신의 활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이자이다. 사진=위키백과

 

공화국·인본주의·화합으로서의 사회주의

저자는 조레스가 의회, 정당, 노동현장 등에서 펼친 정치활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의 진정한 모습을 규명하고자 한다. 조레스의 사회주의에는 흔히 ‘공화국’, ‘인본주의’, ‘화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조레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프랑스혁명을 거쳐 확립된 공화국 정신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외치는 혁명의 군호이기에 앞서 국민공동체의 정의와 화합의 정신이었다. 조레스는 민주주의와 보통선거를 이룩한 공화국의 성과를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조레스는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믿지 않았으며, 계급의 틀로 가둘 수 없는 개인의 독자성과 창의성을 중요시했다. 그러기에 사회주의가 ‘자유’의 가치를 간직해야 하고 ‘인본’에 바탕을 두어야 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신뢰한 조레스는 인종적, 민족적 차별을 없애려 애썼으며, 전쟁에도 제국주의적 지배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화합의 정신이었다. 

한 세기 전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정치 무대에 큰발을 내딛었을 때, ‘조레스’가 품은 사회주의는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노동자·농민과 함께 실패와 좌절을 딛으면서 나아가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다. 20세기에 사회주의는 ‘진보’와 ‘희망’을 상징했다. 하지만 역사는 반전의 연속인가? 1990년대에 접어들어 소련과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시장경제 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굳건해졌다. 혁명의 깃발은 빛이 바랜 지 오래고 지난 세기 동안 역사의 진보를 표방해온 사회주의 이념은 퇴조했다. 사회당, 공산당 등 좌파 정당들은 파산 국면에 접어들고 우파 보수정치 시대 열렸다.

사회주의가 황혼기에 접어든 21세기의 벽두에,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그려볼 수 있을까? 대안 세계를 전망하면서 혹여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해보려 한다면, 우리는 어느새 사회주의의 오래된 미래, 장 조레스의 초상을 머릿속에 떠올 릴 수 있을 것이다.

조레스 연구에 반평생을 바친 저자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이용재
전북대 사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프랑스사학회와 한국서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함께 쓰는 역사』, 『영웅 만들기』(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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