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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시문전집
서천 시문전집
  • 최승우
  • 승인 2022.09.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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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규 지음 | 전설련 옮김 | 지만지한국문학 | 177쪽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 1853∼1920)의 자(字)는 태문(泰文)이고, 본관은 함안이다. 서천(西川)은 그의 별호다. 조정규가 살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 사회는 계속되는 외세의 침범과 함께 서양 문물의 유입, 사상의 주입 등으로 변화가 컸던 시기였다.

특히 국권 피탈이라는 전대미문의 황당한 사건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고, 백성의 삶이 짓밟혔다”라고 통곡하고, 자고산으로 들어가 ≪춘추≫를 강론해 ≪주역≫의 이치를 완색했다. 그러다가 오랑캐가 어지럽힌 땅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기고, 만주에 들어갈 뜻을 세웠다. 

그는 1913년과 1915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온다. 서천선생문집이 중국 여행의 산물이다. 그는 1913년 4월 16일 마산항을 출발해 6월 29일 집으로 돌아와 한천재에 들어가기까지 총 74일간의 여정을 자세히 글로 남기고, 특기할 만한 경험을 시로 기록했다.

특히 일기에는 다녀갔던 장소와 인물에 대해서만 기록했던 반면, 한시에서는 다녀간 장소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 공간과 한반도와의 연관성도 연상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만났던 인물들에 대한 기대 등도 한시로 표현했다. 이는 그가 평소 산문보다는 시를 선호하고, 또 시교설(詩敎說)의 입장에서 그가 체험한 것들을 남겨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천의 중국 체험은 중국에 대한 그의 동경과 자손들을 안주시킬 수 있는 곳이라는 기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목격한 중국의 현실은 달랐다. 공맹의 학문이 면면(綿綿)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상업을 우선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면 서양의 학문을 더욱 숭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은 내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강상이 무너지고, 한 중국 안에서도 남과 북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조정규는 이러한 중국의 현실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바라보고 시를 통해 중국의 ‘민낯’을 폭로한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실망을 딛고 유가 문명 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것이 근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기, 외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해 가는 위기에서 유학자로서 그가 선택한 국권 회복의 방법이었다.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봉건과 근대, 개화와 수구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지역 선비 조정규는 유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했다. 서천 조정규의 문집 가운데, 그가 중국을 다녀오며 기록한 일기, 시, 필담, 편지글, 제문을 골라 소개한다. 근대 전환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유학자로서의 현실 인식과 대응, 지역 학자들의 인맥 관계,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읽어 낼 수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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