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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자유탐구, 때로는 고삐도 쥘 줄 알아야
과학적 자유탐구, 때로는 고삐도 쥘 줄 알아야
  • 최승우
  • 승인 2022.09.16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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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⑱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20일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가 「자연과학과 자유: 열역학적 자유」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19강은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의 「동양의 환경철학」, 제20강은 김응빈 연세대 교수(시스템생물학과)의 「생태계의 경쟁과 공생」, 제21강은 김대수 카이스트 교수(생명과학)의 「뇌과학에서 자유의지」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현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어떠한 권위, 사상,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실증적 증거만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로운’ 비판과 반론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소박한 의미에서 ‘자유’는 ‘남에게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중세 이후 인권, 평등, 민주주의와 함께 등장한 근대의 개념인 자유는 지극히 인간중심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런 자유를 자연과학의 직접적인 탐구 대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물에 적용되는 자연법칙의 발견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은 ‘자유’보다 오히려 긴밀한 ‘상호작용’과 ‘간섭’에 의해 나타나는 ‘규칙성’과 ‘조직화’에 더 집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에서도 자유에 대한 관심을 찾아볼 수는 있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운동이나 변화에서 자유와 평등의 비유적 또는 은유적 흔적을 찾아내기도 한다. 특히 많은 수의 입자들로 구성된 계(系)를 탐구하는 열역학의 경우가 그렇다. 비평형 통계열역학의 논리를 사회과학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인류가 추구하는 자유의 증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실제로 보편적인 과학 지식의 증진 덕분에 현대적 의미의 자유와 평등이 힘을 얻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야생 상태의 거칠고 위험한 자연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공포를 핑계로 등장한 폭압적인 정치적, 종교적 절대 권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기술의 발달에 의한 물질적 풍요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가능하게 해준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계,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 그리고 다원주의적 문화 형태가 바로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진 성과라는 지적도 있다. 과학자들이 요구하는 과학적 탐구의 자유도 있다. 오로지 실증적 증거만을 고집하는 비판과 반론의 ‘자유’가 과학자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권리가 돼버렸다. 과학적 탐구의 자유가 권위, 사상, 가치관을 능가하는 최고의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는 "과학 교육은 현대 사회의 학생들이 ‘미래 행복’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국민 행복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두를 위한 과학교육’을 적극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에서도 ‘자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지극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수학에서도 ‘자유(fre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외부의 간섭이나 제약이 배제되는 ‘불간섭(不干涉)’의 ‘자유로운’ 상태를 뜻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사물의 물리적 움직임이나 변화의 과정에 적용되는 제한 또는 제약을 ‘자유도(freedom)’라고 부르기도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런 ‘자유’는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과학이 없었으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학 교육은 현대 사회의 학생들이 ‘미래 행복’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산업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20세기 초의 주장이지만 그 유효성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국민 행복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두를 위한 과학 교육(Science for all)’을 적극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19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로알드 호프만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세기의 화학을 비롯한 과학이 인류에게 생태계로부터의 자립과 민주화의 꿈을 실현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누구에게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유토피아적 민주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극단적인 굶주림, 빈곤, 사회적 차별은 상당한 수준까지 완화하고, 자유와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하게 현대의 과학과 기술 덕분이라고 한다.

흔히 근대의 산물인 현대의 과학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다고 한다. 과학 탐구에 임하는 자세를 말하는 ‘과학 정신’, 과학 탐구의 성과로 획득한 ‘과학 지식’, 그리고 과학 지식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과학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정신과 지식과 기술의 구분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개념적 구분은 분명하다.

특히 과학 지식의 내용과 과학 기술의 특성은 과학 정신에 의해 규정된다. 과학정신은 합리성을 핵심으로 개방성, 비판성, 자율성, 보편성, 엄밀성 등으로 구성된다. 그 중에서도 실험 정신에서 나타나는 ‘비판적 합리성(critical rationalism)’이 특히 강조된다. 현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어떠한 권위, 사상,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실증적 증거만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로운’ 비판과 반론이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과학적 탐구의 자유가 인류 사회가 요구하는 일반적인 법과 윤리의 한계를 함부로 넘어설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치 중립적인 과학 지식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파괴적 기술을 강요하는 정치적 영향력은 적극적으로 경계한다. 과학적 지식을 자의적으로 왜곡했던 우생학이나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나 생화학 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강요하는 정치적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성직자들처럼 높은 수준의 윤리 의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에게 호기심, 이타심, 합리적 동기 등이 원동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비합리적이고 어둡고 칙칙한 심리적 요소가 진리를 추구하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반드시 더 나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과학자도 역시 윤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과학 탐구의 자유에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책임도 수반된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성과물이 어떻게 이용되고, 오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물질의 위험성과 오용 가능성을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한 물질적 풍요에도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산업적 합성에 사용되는 천연자원의 고갈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오늘날 전 지구적 과제로 등장한 기후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급격하게 소비가 늘어난 석탄·석유·천연가스의 연소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산화탄소가 지구 대기의 온도를 상승시키는 온실가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과연 ‘친환경 에너지’로 알려지고 있는 태양광이나 풍력이 화석연료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한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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