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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고 산책하듯”…‘고병권의 자본 강의’ 독자와 함께 읽고 쓰다
“곱씹고 산책하듯”…‘고병권의 자본 강의’ 독자와 함께 읽고 쓰다
  • 김재호
  • 승인 2022.09.08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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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I권, 총 12권으로 해석·종합해 총 1천280쪽으로 출간

“3년의 집필 기간, 5년간 독서모임, 12회 대중강연, 6개월 전국 서점 세미나” 최근 『고병권의 자본 강의』(천년의상상)를 출간한 고병권 서울과기대 강사(사진·51세)는 지난 5일,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만나 이같이 말했다. 작가이자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인 고병권 저자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 학술연구교수로서 현장인문학 연구를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는 ‘읽기의집’도 운영하며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다. 

 

고병권 작가는 독자들과 함께 마르크스의 『자본』 I권을 읽으며 총 12권의 책을 펴냈다. 최근엔 이 12권을 종합해 총 1천280쪽에 달하는 『고병권의 자본 강의』를 출간했다. 사진=김재호

『고병권의 자본 강의』는 2017년부터 진행된 자본 읽기의 결과물인 12권을 하나로 묶었다. 총 1천280쪽에 달하는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 I권을 “함께 걸어가면서 읽는” 차원에서 집필한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기획자·저자·편집자·디자이너·독자들이 ‘북클럽 자본’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며 『자본』을 읽었다. 그 결과, 이 시리즈는 제62회 한국출판문화상 기획편집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고 작가는 “12권을 함께 읽은 독자들은 대학생, 교수, 노동자, 자영업자, 주부 등 그야말로 다양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부터 올해 겨울까지 6개월 간은 전국의 독립서점을 방문하며 독자들과 직접 소통했다. 

고 작가는 “12권을 집필할 때, 1권을 탈고할 때마다 일주일은 무조건 쉬면서 하염없이 걸었다”라며 “책상에는 늘 3개의 원고가 있었는데, 각각 집필·교정·강연원고들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격월로 책을 쓰고 중간 중간 강연까지 진행해야 했던 그는 “동시에 여러 원고를 써야하는 부담감 때문에 중간에 두세 번은 마감일을 지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12권은 출간 기준으로만 따지면 총 2년6개월이 걸렸다. 기획과 집필, 후원, 독서에 수많은 독자들이 함께 했다. 

고 작가는 “대학 때 독서·운동·출판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던 것이 좋았다”라며 “마르크스의 『자본』 함께 읽기와 강연도 그 방식을 활용했다”라고 말했다. 이번 책은 내용이나 분량, 작업 과정 등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고 작가는 “집필이 진행되던 3년 동안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도 최소로 했다”라며 “읽고 쓰는 일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힘은 들었지만 나중에 틀림없이 이 시간을 부러워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 작가는 서울대에서 「서유럽에서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김진균 전 서울대 명예교수(1937∼2004)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석사학위를 지도 받았다. 고 작가는 “고 김진균 교수로부터 학문에 대해 여러 도움을 받았다”라고 밝혔다. 특히 고 작가는 “대학에 소속돼 있었지만 대학 밖에 있는 서울사회과학연구소에서 공부하며 읽기의 즐거움을 느꼈다”라며 “당시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선배였던 이진경 서울과기대 교수(기초교육학부)로부터 마르크스 및 사회사상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배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부가 너무 좋았다”라고 말했다. 

 

 

반복된 독해·단상 따르며 좌표를 설정

고 작가의 독서법이 궁금하다. 그는 “자본을 여러 번 읽으며, 나의 독해와 단상을 중요시했다”라며 “마르크스의 해석에 있어 주요한 인물들, 이를테면 레닌, 그람시, 루카치, 알튀세르 등의 지형을  머릿속에 그려두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가 읽어낸 것을 중시했다”라고 강조했다. 고 작가는 “그 이후에 나와 생각이 같은 것들이 있는지, 나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2차 문헌을 찾아본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들의 언어와 자본가들의 언어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아이들의 언어를 직접 오려 붙였는데,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준어와 방언을 왜 교차 편집했는가, 아동 노동자들이 맞춤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등을 따라가려고 한다. 마르크스는 소년 노동자들의 증언으로부터 성인 여성 노동자 및 소녀 노동자들의 처지를 유추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노동자, 소녀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직접 말할 수 없다는 것의 의미를 다룬 자료들을 찾아본다.” 

고 작가는 “나에게 사유란 칸트와 같이 건축물이 아니라 덩굴식물처럼 여기 저기서 자라고 얽혀서 숲을 이루는 것”이라며 “책도 다른 책들과 만나면서 짜인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이라는 책을 놓고 우리 삶의 환경 등 여러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라며 “사유를 만들어가는 좋은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기업은 어쩌다 타락한 공동체가 되었나

『고병권의 자본 강의』에선 “일을 ‘함께’ 했는데 ‘함께’는 사라지고 개인만 남습니다”(481쪽)라고 적었다. 그리고 자본가(거인노동자)와 부분노동자를 구분했다. 현대사회에서 자본가는 거대 기업의 대표라고 간주해야 할까? 기업 대표 역시 정치나 노동조합, 미디어나 국민의 눈으로 견제를 받기에 자본가 역시 개인으로서만 남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고 작가는 “‘자본가’를 곧바로 ‘거인노동자’라고 부른 건 아니다”라며 “개별 노동자들을 묶어 거인으로 조직한 것, 그리고 이 거인노동자가 만들어낸 성과물을 차지한 것이 자본가”라고 답했다. 그는 “『자본』 III권에서 마르크스는 ‘기능자본가’와 ‘소유자본가’(자본소유자)를 나눈다”라며 “기업 대표들은 자본가의 역할 즉 지휘 및 감독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노동자라고 부를 수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본소유자에 의해 고용된 피고용인의 면모도 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고 작가는 “최근에는 이들에게 막대한 ‘스톡옵션’ 등이 제공되고 이것이 실제 급여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라며 “이들의 이해관계가 주주들 즉 자본소유자의 이해관계와 일치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거인노동자’에 대해 쓸 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공동성의 중요성이었다”라며 “‘컴퍼니’란 ‘쿰(cum)’(함께)과 ‘파니스(panis)’(빵)가 합쳐진 말로서 기업은 원래 공동체였다”라고 설명했다. 고 작가는 “오늘날 기업은 그 구성원인 노동자들의 생계를 돌보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가만의 배타적 이익결사체가 되어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오늘날 기업들은 공동체를 배신한 공동체, 타락한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그는 비판했다. 

“자본의 창세기, 첫 문장은 이것입니다. 태초에 수탈이 있었다!”(1045쪽) 만약 그렇다면 합법적 약탈이라는 자본의 속성을 알고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운명은 선택권이 없는 것일까? 대안은 무엇일까? 고 작가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 노동할 수 없는 사람도 살아갈 수 있는 기본 돌봄이 존재한다면, 운명의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인 한에서 기본 성격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라고 답했다. 그는 “자본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여지를 확보해나가다 보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에게 할당된 운명,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운명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고병권 박사는 노동력 상품화 자체가 지닌 폭력성과 생산과정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사진=김재호

 

‘자본’의 기본 개념을 다시 연구하면 어떨까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잉여가치’와 ‘잉여자본’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잉여가치와 잉여자본은 애초부터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골고루 분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고 작가는 “착취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결과라기보다 시스템이 성립하고 기능하기 위한 전제”라며 “분배를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폭력성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는 있지만 한계가 있다”라고 답했다. 그는 “자본의 축적을 저해할 정도로 분배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라며 “뿐만 아니라 분배에만 주목하는 것은 노동력 상품화 자체가 지닌 폭력성(상품성 있는 신체의 문제), 생산과정의 폭력성(노동과정에서의 소외) 등을 놓칠 수 있다”라고 경계했다. 

『고병권의 자본 강의』를 최근 노동계 이슈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예를 들어, 13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는 파업 후 손해배상 관련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고 작가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증식이 이루어지는 경제적 생산양식이지만 또한 자본(자본가)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지배양식”이라며 “자본주의란 자본(계급으로서의 자본가)이 주권자인 사회이고, 법률(법칙)은 자본의 주권이 관철되는 형태로 세팅되어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청구에서 통치자로서 자본이 휘두르는 맨얼굴의 폭력을 보는 것 같다”라며 “이것은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규율의 문제”라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손실을 보상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규율을 잡기 위한 것”이자 “노동조합 탈퇴를 유도하거나 해고자의 복직 포기를 유도하는 수단”이라는 뜻이다. 

고 작가는 독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자본』을 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자본』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에게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다시 연구해보자는 제안을 드리고 싶다.”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정치이론가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였다. 그는 『자본』을 통해 노동의 소외와 잉여가치, 자본의 재생산 등을 비판했다. 사진=위키백과

***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이번 책은 내용이나 분량, 작업 과정 등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무척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본래 두 달에 한 권씩 열두 권을 펴내기로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12권을 모두 펴냈고, 이번에 이 12권을 묶어 한 권으로 다시 펴냈습니다. 이렇게 끝맺음을 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집필이 진행되던 3년 동안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도 최소로 했고요. 그냥 읽고 쓰고 산책하는 일이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힘은 들지만 나중에 틀림없이 이 시간을 부러워할 거라고. 읽고 쓰는 일은 제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제가 공부하고 싶었고 또 글을 쓰고 싶었던 마르크스에 대한 일이었으니까요. 지금 벌써 지난 시간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체력부담도 있고 생계부담도 있지만 여건만 된다면 계속 하고 싶은 일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 『고병권의 자본 강의』를 각각 한 말씀으로 요약하자면 무엇인가.

책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라고 하셨는데요. 우스개삼아 말해보자면 사실 제 책은 ‘요약’에 반대하는 책입니다. 서점에는 지금도 『자본』,을 요약해주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책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이번 책을 통해 반대의 독서를 제안했습니다. 제가 쓴 책은 『자본』,의 문장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보자고 제안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자본』,보다 두꺼운 책이 되고 말았지요. 그만큼 『자본』,은 지금 우리 시대와 우리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책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핵심은 이거야’라고 말하는 대신, 마르크스가 문장들에 접혀 있는 여러 생각들을 하나씩 펼쳐가며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우리시대를 읽는 하나의 눈을 선물한 책, 혹은 우리시대에 하나의 조명을 비춰준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 우리시대 즉 자본주의를 읽어낸 책이지요. 제가 쓴 책은 마르크스의 문장들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어딘가에서 『자본』,을 읽어가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읽기의 길을 함께 하는 사람에게 눈앞의 문장과 단락들에 대한 제 생각을 밝혀놓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을 ‘함께’ 했는데 ‘함께’는 사라지고 개인만 남습니다.”(481쪽)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자본가(거인노동자)와 부분노동자를 구분했다. 현대사회에서 자본가는 거대 기업의 대표라고 간주해야 할까? 기업 대표 역시 정치나 노동조합, 미디어나 국민의 눈으로 견제를 받기에 자본가 역시 개인으로서만 남는 것은 아닌가.

제가 ‘자본가’를 곧바로 ‘거인노동자’라고 부른 건 아닙니다. 개별 노동자들을 묶어 거인으로 조직한 것, 그리고 이 거인노동자가 만들어낸 성과물을 차지한 것이 자본가라고 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대 기업의 대표는 자본가인가. 제가 다룬 『자본』 I권에서는 자본가를 개인이 아니라 계급으로서, 그것도 총자본의 인격적 구현으로 상정하고 있으니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과 기업에 투자한 사람을 나누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 III권에서 마르크스는 ‘기능자본가’와 ‘소유자본가’(자본소유자)를 나눕니다. 기능자본가는 자기 것이 아닌 자본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인데요. 기업 대표의 경우, 이를테면 CEO의 경우 자본가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능자본가’의 면모를 갖고 있습니다. 소유자본가와의 실제 관계에 따라서는 자본가라고 보기 어려운 면모도 있고요. 자본가의 역할 즉 지휘 및 감독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노동자라고 부를 수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본소유자에 의해 고용된 피고용인의 면모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들에게 막대한 ‘스톡옵션’ 등이 제공되고 이것이 실제 급여보다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이해관계가 주주들 즉 자본소유자의 이해관계와 일치해가겠죠.  
사실 내가 ‘거인노동자’에 대해 쓸 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공동성의 중요성이었습니다. 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함께’가 갖는 중요성과 의미를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기업과 관련해서 보자면 기업은 원래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성의 힘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했던 공동체의 한 형태입니다. ‘컴퍼니’란 ‘쿰(cum)’(함께)과 ‘파니스(panis)’(빵)가 합쳐진 말입니다. ‘빵을 함께 먹는 사람들’ 즉 생계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업은 그 구성원인 노동자들의 생계를 돌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자본가만의 배타적 이익결사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를 부리고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 노동자들을 내쫓을 준비도 되어 있지요. 노동자를 공동체의 성원으로 간주하지 않는 겁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기업들은 공동체를 배신한 공동체, 타락한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내가 정말로 ‘함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싶은 쪽은 노동자들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빼앗기는 것이 땀방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노동자들은 ‘함께’ 또한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생산현장에서 발휘하는 생산력의 원천이지만 투쟁에 있어서도, 일상에서도 힘의 원천입니다. ‘거인노동자’의 의미를 노동자들이 되새겼으면 합니다.

△“자본의 창세기, 첫 문장은 이것입니다. 태초에 수탈이 있었다!”(1045쪽) 만약 그렇다면 합법적 약탈이라는 자본의 속성을 알고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운명은 선택권이 없는 것인가?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노동자에게는 운명의 선택권이 없는가. 마르크스의 생각을 따르자면 운명의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다시 말해 취업하는 것 말고는 다른 살 길이 없을 때 사람들은 노동자가 됩니다. 다수의 생산 인구가 취업 말고는 살 길이 없어진 상태가 역사적으로 출현한 것, 이것이 마르크스가 이해하는 자본주의의 시작입니다. 물론 개인으로서 노동자는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을 겁니다. 회사를 옮기는 사람도 있을 테고 퇴사하고 자영업자가 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창업을 해서 자본가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계급으로서 노동자는 다릅니다. 한 자본가를 피할 수는 있지만 자본가 계급을 피하기는 어렵고, 오늘, 이번 달, 올해 노동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내일까지, 다음달까지, 내년까지 일자리 없이 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사회가 공동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면, 그래서 노동하지 않는 사람, 노동할 수 없는 사람도 살아갈 수 있는 기본 돌봄이 존재한다면, 운명의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늘어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인 한에서 기본 성격이 크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노동력을 파는 것이 우리 사회의 다수 인구가 살아가는 기본 방식이 될 겁니다. 노동자의 운명을 사는 거죠.
하지만 ‘여기는 자본주의니까 별 수 없어’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도 비자본주의적 관계는 존재하며(비록 지배적 관계는 아니지만요) 그런 관계, 그런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도 자본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서로 돌봄’의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것은 취업에 성공한 노동자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자본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여지를 확보해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시간 단축을 강조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는데요.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의 생명력이 소진되는 시간을 줄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노동자의 자유시간이 늘어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개혁을 위한 첫걸음이 여기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자유시간의 확대가 노동하기 위해 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새롭게 기획해보고 시도해보는 시간이 되어야겠지요. 이런 시도들이 집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에게 할당된 운명,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운명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잉여가치와 잉여자본은 애초부터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골고루 분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역사란 누군가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부터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이상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주어진 사회형태를 분석할 뿐입니다. 모든 사회형태들은 구성원들과 그 구성원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생산(재생산)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이러한 생산이 자본의 축적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말하자면 물자의 생산과 유통의 목적이 잉여가치 즉 이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물건을 생산하는 게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필요한 물건이어도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을 얻기 위해 상품의 생산과 유통 및 분배 시스템이 돌아가는데요. 마르크스는 이 이윤이 착취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착취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결과라기보다 시스템이 성립하고 기능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바로 이 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분배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잉여가치(이윤) 내지 잉여생산물을 사회구성원들에게 소득 형태로든 복지 서비스의 형태로든 분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폭력성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여러 차례 언급하듯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본의 축적을 저해할 정도로 분배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배에만 주목하는 것은 노동력 상품화 자체가 지닌 폭력성(상품성 있는 신체의 문제), 생산과정의 폭력성(노동과정에서의 소외) 등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번의 책의 의미를, 최근 노동계 이슈들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까? 예를 들어, 13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는 파업 후 손해배상 관련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 홍수로 사망한 반지하 일가족 3명, 수원 세모녀 자살 사건 등.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는 내용이기도 하고 제가 책에서 자주 부각시키는 것이 있는데요. 자본주의는 자본의 증식이 이루어지는 경제적 생산양식이지만 또한 자본(자본가)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지배양식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공장에 대해 ‘공장체제’(Fabrikregime)라는 말을 씁니다. 체제라는 것은 지배의 문제로 본다는 거지요. 그는 공장을 자본가의 규율이 관철되는 전제정 내지 독재체제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본주의 사회 전체를 ‘자본의 전제정’이라고 부릅니다. 자본주의란 자본(계급으로서의 자본가)이 주권자인 사회이고, 법률(법칙)은 자본의 주권이 관철되는 형태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최근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청구에서 나는 통치자로서 자본이 휘두르는 맨얼굴의 폭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규율의 문제입니다. 손실을 보상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규율을 잡기 위한 것이죠. 사측도 터무니없는 액수의 청구금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규율의 수단입니다. 노동조합 탈퇴를 유도하거나 해고자의 복직 포기를 유도하는 수단이었지요. 마르크스가 잘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노동뿐만이 아니라 복종을 필요로 하는 체제입니다.
최근 수해로 사망한 반지하 가족 문제는 언뜻 보면 자본관계의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을 확인할 때 이와 같은 사람들에 주목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임금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지면을 고용관계 주변 혹은 고용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애했습니다. 자본주의가 확고한 토대를 갖춘 지배적 생산양식이 되면, 임금노동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 심지어 자연생태계까지도 그 운명이 자본의 운동에 내맡겨집니다. 운명이 예속되는 거지요. 그리고 자본관계의 외곽에 위치할수록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이 부과한 운명은 가혹해지고 선명해집니다.
반지하방에 살았던 가족들은 여성노동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였습니다. 자본관계의 외곽을 이루는 사람들, 부차적인 형태로 혹은 배제된 형태로 자본관계에 포함된 사람들이 한 가족을 이루며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면 관계상 길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 생각에 마르크스는 여기에 혁명의 지렛대를 대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자본관계의 핵심에 있는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자본』을 쓰면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혁명의 지렛대가 사회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어떤 사회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자 자본주의를 바꾸어야 하는 이유, 자본주의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회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하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본인에게 독서, 집필, 강연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후, 대학 밖에서 활동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사실상 읽고 쓰고 말하기가 전부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읽기와 쓰기, 말하기는 제 삶을 요약하는 세 단어입니다. 
대학 바깥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 질문입니다. 예전에는 이 질문을 많이 받기도 하고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대기도 했는데, 이제는 묻는 사람도 사라지고 저도 제가 대학 바깥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제게 어디서 활동하느냐고 물으면, 대학 바깥에서 활동한다고 말하지 않고, 제가 수업을 하는 ‘노들야학’이나 제가 동료들과 책을 읽는 ‘읽기의 집’에서 활동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사회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는 소위 재야연구실이라는 것이 특별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제 동기들 대다수가 대학 바깥에 있는 이런저런 연구실에도 참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공부에 대한 고민과 운동에 대한 고민이 많이 겹쳐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학원은 사회운동의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고, 사회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최신의 이론을 공부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대학 바깥 연구실을 찾는 것이 사회운동의 관점에서도, 공부의 관점에서도 자연스러웠죠. 대학의 분과체제도 좀 답답했습니다. 전공별로, 전공 안에서도 세부전공에 따라 칸막이가 있었죠. 게다가 2000년대 이후 대학에서의 연구와 교육, 심지어는 물리적 공간조차 매우 상업화되고 있었습니다. 대학이 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의 장소가 아니라 부와 권력에 이르는 통로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유너머 같은 연구자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연구자들이 전공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배우고 연구하며, 우리가 살아갈 삶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했으니까요. 지금은 딱히 대학에 대한 별 느낌이 없습니다. 시간 강의도 별로 하지 않아서 정말로 대학 근처에 갈 일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대학에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대학 역시 그 동안 저에게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공부할 주제들은 제가 있는 현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고, 함께 공부할 사람들도 주변에 있었으니까요. 대학이 요즘 어떤 상황인지 지금은 제가 전혀 모릅니다.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이나 연구자, 대학사회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책의 뒤표지에 적은 말 그대로입니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자본』을 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자본』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에게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다시 연구해보자는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들, 마르크스가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춘 개념들을 재검토해보자고, 그리고 어떤 불합리에 봉착하지 않는 한 최대한 멀리까지 해석해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생산양식, 이런 축적양식, 이런 지배양식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자본』을 발제문 삼아 자본주의의 기본 인식들을 발본적으로 재검토해보는 게 어떤가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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