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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7] 크로포트킨의 만장엔 “권력 있으면 자유 없다”가 쓰여 있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7] 크로포트킨의 만장엔 “권력 있으면 자유 없다”가 쓰여 있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9.16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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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의 삶
죽은 뒤 침대 위에 누워있는 크로포트킨 사진=위키미디어
죽은 뒤 침대 위에 누워있는 크로포트킨 사진=위키미디어

모스크바에 아르바트라는 거리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크렘린 뒤, 아르바트 옆 스타라야 코뉴세나야가라는 조용한 동네는 크로포트킨이 파리의 귀족 주택지구인 생제르망에 해당된다고 한 곳이다(자서전 54). 지금은 크로포트킨가라고 불리는 그 거리 끝쯤에 그의 생가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재는 팔레스타인 대사관 건물로 쓰이고 있다.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2500년 이상 평화롭게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나라는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게 국가로 인정받지 못해 대사관을 두지도 못하여 모스크바에서 그 대사관을 보면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하다. 

모스크바의 아르바이트 거리. 사진=위키미디어
모스크바의 아르바이트 거리. 사진=위키미디어

크로포트킨 생가가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밖의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보다는 팔레스타인 대사관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 집에서 태어난 크로포트킨의 이미지와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철문이 굳게 잠겨 있고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 없어서 마치 역사의 감옥에 갇힌 느낌으로 철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안을 들여다 본 슬픈 추억이 있다. 크로포트킨이 창시했다는 아나키즘의 운명처럼 보인 탓이었을까?

 『죽음의 집의 기록』을 현실에서 보다
 
크로포트킨은 거대한 토지를 가진 러시아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그가 “가장 무의미한 방식으로 가르쳤다”고 회고한 중학교와 소년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로부터 평등을 배웠고, 당시 러시아의 급진적인 논문과 소설을 읽고 자랐다. 그는 귀족의 자제가 가는 근위학교에 다녔으나 출세의 가도가 아닌 시베리아 군복무를 자원했다. 

시베리아에서 형벌 제도를 조사하면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을 실제로 목격하고서 국가에 대한 신념을 버렸다. 그 후 그는 동시베리아와 만주를 여행하면서 원시생활을 예찬하게 되는데 이는 뒤에 문화인류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그는 시베리아에 유형 중인 정치범들과 사귀면서 프루동의 책들을 읽었지만 그가 아나키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두호보르파의 공동생활을 보고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추방형을 당한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는 러시아 군인들. 사진=위키미디어

두호보르파(Doukhobors)는 러시아 정교의 한 분파로, 교회가 아닌 신앙을 중심으로 한 개혁을 주장하고 국가를 부정하며 군국주의와 전쟁에도 반대해 정부와 교회의 탄압을 받았다. “형제애를 기반으로 한 반(半)공산주의적 조직”으로 이익을 본 그들에게서 그는 “문명의 영향력이 없이도 복잡한 사회조직이 만들어질 수 있음”(자서전 289)을 깨달았다. 

그리고 “명령과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상호이해를 원칙으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점”을 깨닫고 “그때까지 견지해온 신념을 시베리아에서 모두 버렸다. 나는 이미 아나키스트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자서전 290). 톨스토이도 1894년에 두호보르파를 알게 되어 『부활』을 집필하여 그 인세로 그들을 도운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늑대, 새, 사슴의 협력을 목격하며 아나키스트가 되다

1862년부터 1867년까지 시베리아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여러 지질 탐험에 참여한 그는 5년 동안 5만 마일을 여행했는데 대부분 아무런 소유물이 없이 말을 타고 행군하는 고행이어서 비글호를 타고 다윈의 항해에 대한 그의 극지방 버전이라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관찰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지도 제작을 수정한 산맥의 구조적 선 ​​이론을 정교화하고 또한 종래 빙하 기간의 아시아에 의한 유럽 침략이라고 한 것이 사실은 기후변동에 의한 민족대이동이었음을 밝혔다. 그의 발견은 즉각 인정을 받아 과학자로서의 출세 길이 열렸으나 1871년에 그는 러시아 지리 학회의 비서직을 거부하고 자신의 귀족 유산을 포기하면서 사회 정의의 대의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시베리아 황야를 여행하면서 크로포트킨은 같은 종의 동물들 사이에 충돌이 거의 또는 전혀 없이 서로 협동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늑대, 서로에게 먹이를 주거나 따뜻하게 지내는 것을 돕는 새, 일제히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 사슴, 포식자에 대해 방어적인 대형을 형성하는 말 등을 보고 그는 상호협력에 대한 신념을 굳혔다. 그리고 프루동, 알렉산드르 게르젠,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저명한 사상가들의 책을 읽고 모든 형태의 정부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나키즘으로 개종했다. 

크로포트킨은 서로에게 먹이를 주거나 따뜻하게 지내는 것을 돕는 새를 보며 상호협력에 대한 신념을 굳혔다. 사진=위키미디어

1866년 폴란드의 정치범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형을 당하자 그는 군대를 사직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대학에서 지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1872년에는 쥐라 산맥의 스위스 시계공들을 만나 아나키즘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고 바쿠닌 지지자의 일원으로 제1인터내셔널 회의에 러시아 아나키스트 대표로 참석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그는 바쿠닌을 쉽게 만날 수도 있었으나 두 사람은 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두 사람의 기질 차이 때문이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가가 아니라 이론가였고, 폭력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기질적으로 반폭력적이었으며 오히려 종교적이었다. 그는 바쿠닌과 달리 조직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러시아’로 탈출·투옥·결혼·망명

러시아로 돌아온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선전하는 혁명적 그룹인 차이코콥스키단에 합류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3년간 혁명 선전활동을 했다. 1874년에 혁명 모의 혐의로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감옥에 수감되었지만 2년 후 서유럽으로  탈출했다. 그 후 1881년 혁명가들에 의해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후 러시아 정부의 요구로 추방될 때까지 주로 스위스에서 살다가 프랑스로 이주했지만 다시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되었다. 1878년에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스위스에서 도피 중 소피아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했다.

크로포트킨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감옥에 수감되었지만 2년 후 서유럽으로  탈출했다. 사진=위키미디어

1886년에 석방된 그는 영국에 정착하여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긴 망명 동안 크로포트킨은 많은 책들을 썼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역자의 말』(1885), 『러시아와 프랑스 감옥에서』(1887), 『빵의 쟁취』(1892), 『들판, 공장, 작업장』(1899), 『혁명가의 회고록』(1899), 『상호협력』(1902), 『러시아 문학』(1905), 『프랑스 대혁명 1789–1793』(1909) 등이다. 망명 생활 동안 크로포트킨은 언제나 자택을 개방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아나키즘 운동의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다. 특히 크로포트킨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권위주의에 반발하여 연합국을 지지해 아나키스트 사이의 강력한 반군사주의 전통을 위반하여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74세인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는 임시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제의받았으나 완강히 거절하고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의 볼셰비키 정부를 비판하면서 마지막 저서인 『윤리학』을 완성하지 못하고 1921년에 죽었다.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군중들 앞에서 그를 찬양했지만 만년의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기에 쓸쓸한 만년이고 죽음이었다. 

크로포트킨에 참여한 인파. 사진=위키미디어
크로포트킨에 참여한 인파. 사진=위키미디어

장례에 사용된 검정색 만장(挽章)에 쓰인 다홍색 만사(挽詞)는 “권력 있으면 자유 없다”는 한마디였다. 평생 권력 없는 자유를 추구한 크로포트킨의 만장에 꼭 맞는 말이었다. 어떤 권력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는 모든 권력에 반대하고 오로지 자유를 추구했다. 그 자유란 모두가 자유롭기에 당연히 평등한 모두가 함께 자치하며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크로포트킨의 만장은 죽은 이의 관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출세 자리, 권력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뒷받침하는 학력이나 경력 등에 대한 칭송과 혈연, 지연, 학연 등 온갖 연줄 따위를 적는 한국식의 친권력 만장과는 정반대인 반권력 만장이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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