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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0년대 연구자…다양한 주체와 시각을 고민한다
나는 80년대 연구자…다양한 주체와 시각을 고민한다
  • 문민기
  • 승인 2022.09.2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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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24) 80년대 연구를 시작하다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현재와 가까운 시기로 올수록 활용할 수 있는 사료가 늘어나면서 
연구 폭의 확장이 가능하다. 
비단 1980년대 연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의 주체들에 주목하는 연구들도 조금씩 수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벽을 만난다. 
저항하는 민중에 관한 연구만이 중요한 것일까.

질문 하나. “너는 80년대 연구자니?”
최근에 필자가 들은 말이다. 흔히 한국사 연구자들에게는 연구하고 있는 ‘시기’에 대한 구분과 질문이 따라 붙는다. 아무래도 역사학이라는 것이 특정한 시기의 모습을 그려내고 분석하는 분과학문이기 때문인 것 같다.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등으로 전공을 구분하고, 한국현대사는 그 중에서도 더욱 자잘하게 해방 직후, 1950년대, 6070 등으로 나누어서 자신의 연구시기를 설명한다.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니 저런 질문을 받을 법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발표했던 논문과 글들은 모두 1980년대를 다루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박사학위논문도 1980년대를 중심으로 구상 중이다. 연구시기와 주제는 연구자의 관심을 나타내며, 이것이 곧 연구자의 정체성으로 이어지니 스스로를 80년대 연구자라고 소개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80년대가 역사냐?”

10년 전만 하더라도 1980년대를 연구시기로 설정한 이에게 “80년대가 역사냐?”는 물음이 뒤따르곤 했었다. 현재와 너무 밀접한 시기라는 것이 이 물음의 가장 주된 이유다. 의미를 풀어보자면 역사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말인데, 역사학이 객관성을 두고 씨름하던 것도 이미 지나간 논쟁이다. 구술 증언 등을 통한 새로운 방법론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오히려 좋다.

박정희나 전두환 때를 연구한다고 하면 자신이 그 당시에 대학생이었으니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라는 선배세대의 농담 섞인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는 1980년대가 여전히 생생한 현재일지 모르나, 요즘 학생들에게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 즉 역사의 영역이다. 게다가 2022년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1980년대의 분석이 요청되고 있다. 최근 1980년대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연구가 쌓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네는 왜 요즘 큰 이야기를 던지지 않느냐?”

질문 둘. “너네는 요즘 무슨 공부하니?”
이것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께 들은 질문이다. 여기서의 너네란 필자 또래의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무슨 공부하느냐는 말은 공통의 관심사와 문제의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말은 “너네는 왜 요즘 큰 이야기를 던지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예전의 근현대사 연구는 거대담론과 이에 관한 논쟁이 펼쳐지던 장이었다. 사회구성체 논쟁, 내재적 발전론,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논쟁을 통해 한국근현대사를 설명하려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연구의 방법론과 관점을 만들어 왔던 선배세대가 보기에 요즘 것들은 ‘자잘한’ 이야기만 하며 변죽을 울리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필자 또한 한동안은 공통의 문제의식과 거대담론 제시가 부재한 상황을 문제적이라 생각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굳이 그래야만 하나’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신진 연구자의 ‘다양성에 대한 고민’

연구자들 개개인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의식 또한 제각각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시각의 연구가 수행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역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과 신진 연구자들의 모임 이름이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라는 것 역시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대한 반대모임으로 시작하여 2016년에 출범한 만인만색은 이름 그대로 각양각색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내용의 활동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공통의 문제의식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다양성에 대한 고민’ 정도를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의 깃발. ‘만 가지 색으로 저항하라!!’라는 문구가 만인만색이 지향하고 있는 바를 잘 드러낸다. 사진 제공=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촬영=김대현

인식의 차이는 강력한 공통의 기억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기인한다. 그리고 선배세대의 대표적인 공통의 기억으로는 ‘승리의 기억’이기도 한 1987년 6월항쟁을 꼽을 수 있다. 6월항쟁은 현재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한국의 여러 모습들을 만들어낸 계기이면서, 동시에 1980년대를 해석하는 하나의 공고한 규정력으로 작용한다. 1980년대라는 역사적 시기를 조금은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기 위한 필자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독재 대 민주’에 저항하기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시각과 분석틀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독재정권과 이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이라는 대립구도가 대종을 이룬다. 다양한 연구가 조금씩 시도되고 있는 박정희 정권기에 비해 전두환 정권기는 ‘독재 대 민주’의 구도를 넘어서는 시각의 연구들이 부족하다.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거쳐 6월항쟁으로 달려가는 운동사와 사건사 차원의 연구들이 주로 이루어지면서 전두환이라는 절대악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의 서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앞서 6월항쟁을 ‘승리의 기억’이라고 칭했지만, 그 승리가 과연 누구의 것이었으며 어떠한 것인지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6월항쟁은 ‘시민’ 혹은 ‘민중’으로 명명되는 다양한 층위의 주체들이 참여한 항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항쟁 참여는커녕 존재 자체가 지워져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의 죽음은 1987년 1월 16일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월 18일 <조선일보>를 통해 부산에 위치한 형제복지원의 문제가 보도된다. 

부산에 있었던 형제복지원 전경. 수많은 건물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통해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진=형제복지지원재단 운영자료집

이어진 후속보도를 통해 10년 동안 형제복지원 원생 513명이 사망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통해 사망자가 추가 확인되면서 형제복지원 사망자 수는 총 657명으로 확인됐다). 박종철의 죽음은 한국사회를 뒤흔들었지만, 형제복지원 원생들의 죽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갔다.

이러한 차이는 형제복지원이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대표적인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는 데서 발생한다. 수용시설의 담장은 안과 밖을 나누는 물리적인 벽 이상을 의미하며, 사회적 공간을 분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수용자는 수용시설에 들어오는 순간 유령처럼 잊힌 존재가 된다. 사회로부터 담장 ‘안’으로 배제되는 과정은 수용자들의 죽음을 상대적으로 쉽게 잊어도 되는, 가치가 없는 ‘비인간’의 것으로 만들었다.

‘시민’ 혹은 ‘민중’의 다양한 층위와 해석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한국의 수많은 수용시설 문제는 근본적으로 공권력에 의한 국가폭력 문제이지만, 이것만을 강조한다면 국가폭력과 정권을 악마화하는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독재 대 민주’라는 구도와 결합한다면 모든 문제는 정권의 잘못으로 돌리게 되고, 그러한 폭력에 종언을 고한 6월항쟁은 다시금 승리의 기억으로 소환된다.

그러나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형제복지원을 운영하던 재단은 이름을 바꿔 사업을 계속했고, 다른 수용시설들도 아무런 문제없이 쭉 운영되었다. 부랑인이 사라진 자리는 또 다른 ‘비인간’ 존재들이 채웠다. 문제를 야기하고 구조화시키는 것은 정권과 공권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용자들은 ‘승리’할 수 없었다.

수용자들은 경찰과 공무원의 단속은 물론 일반 시민들의 신고로 인해 수용시설로 가게 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부랑인을 치워버리기 위해 신고를 하는 감각은 어디서 왔을까. 이는 오랜 기간 동안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사회정화 담론과 연결된다. 사회정화는 ‘비정상의 물리적 척결’을 운동의 방법으로 내세웠고, 시민들의 ‘고발정신’을 강조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목적으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성격을 형성해 가는 데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독재 대 민주’의 구도에서 살짝 거리를 두고 이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시민’ 혹은 ‘민중’이라고 명명되었던 집단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다. 독재에 저항한 정의로운 민중들은, 물론 그 내부에서도 다양한 층위로 성격이 나뉘고 갈등하는 존재지만, 부랑인이나 장애인 같은 소수자들에게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일 수 있다. 이런 시각이 한국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혐오에 관한 역사적 해석이 이뤄지는 데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도 하면서 연구를 하는 중이다.

현재와 가까운 시기로 올수록 활용할 수 있는 사료가 늘어나면서 연구 폭의 확장이 가능하다. 비단 1980년대 연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의 주체들에 주목하는 연구들도 조금씩 수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벽을 만난다. 저항하는 민중에 관한 연구만이 중요한 것일까. 모쪼록 다양한 주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가진 연구가 더 많이 나오고 읽히길 바란다.

문민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이라는 신분 하나에 기대어 연구소 연구실의 한 자리를 차지해 박사논문을 쓰고자 애쓰고 있다. 한국에서 사회정화가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이것이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수용시설 문제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장애인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에서 ‘비국민’ 혹은 ‘비인간’으로 규정되었던 이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갖고 있다. 나아가 동물이나 자연환경 같은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역사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도 고민이다.
발표한 논문으로는 「유신체제기 대기업의 사회사업 시행과 기업의 역할」, 「1980년대 한국 대자본의 중국 경제교류 배경과 인식」, 「1980년대 한국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흐름’ 형성」 등이 있다. 구술 증언을 채록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였고,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 사북팀에 참여하여 『사북항쟁 구술자료총서』(총3권)를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과 한국사 연구』(공저), 『1980년 사북: 항쟁과 일상의 사회사』(공저) 등의 출간작업에 함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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