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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사회, 품격 잃은 언어
분열된 사회, 품격 잃은 언어
  • 최재목
  • 승인 2022.10.0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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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최재목 논설위원 /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논설위원

언어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세상이 각박하면 말도 각박해진다. 언어는 우리들의 정신상태를 닮아간다. 예컨대 ‘개맛있다, 개웃겨’ 같은 신조 비속어의 ‘개’는 과거의 ‘킹, 왕’ 같은 말을 대신하여 ‘너무, 매우’라는 강조의 뜻이다. 아울러 ‘개’ 자가 붙으면 ‘질이 떨어지는, 헛되게’ 등도 의미한다.

이런 말들은 상투적인 ‘개ㅇㅇ’라는 데서 진화했다. 특정 지역에서는 ‘그 사람, 저 사람’을 ‘글마, 절마’라고들 한다. ‘이놈, 저놈’과 같은 비속어이다. 이런 표현들은 내 편과 네 편을 구별하고, 나아가 내 편 아닌 것을 차별하며 갈라치는 분열의 선동 문구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두 패거리로 분열돼 있다. 가관이다. 정치와 이에 야합한 언론은 상대편을 공격하고 때려잡는 데 진심이다. 존중, 배려, 자비란 없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쟁판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고 했던 단재 신채호의 민족적 스케일의 문제의식이 아닌 정치 패거리의 양아치 싸움으로 퇴락했다.

패거리의 양상은 어떤가. 한쪽은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행동하고, 한쪽은 방관자적 개인으로 무기력하다. 전자는 진보적-낭만적이긴 하나 어른스럽지 못하고, 후자는 보수적-고전적이긴 하나 양반인 체 생기발랄하지 못하다. 전자는 언행에 기민하고 선전 선동에 능하며 일사불란 단합한다. 후자는 언행에 둔감하며 품위와 체면에 신경 쓰며 오합지졸이다. 양자 모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신생왕국 벨기에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산업의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보들레르는 그곳을 방문한다. 그때 벨기에인들의 패거리 주의를 목도하고 이렇게 비판한다. “단체를 좋아하는 벨기에 사람들…이들은 하나의 의견을 찾아내려고 단체를 조직한다.” “세상은 공동으로, 패거리로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벨기에인들의 모임처럼.”

그는 말을 덧붙인다. “진보에의 신념은 게으른 사람들, 벨기에인들의 주의주장이다…개인의 내부에서 그리고 개인 자신에 의해서만이 (진정한 즉 정신적인) 진보가 있을 수 있겠다”라고. 패거리가 아니라 개개인에 의한 정신적 진보를 말하고 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는 ‘붕당론’에서 군자의 붕당은 필요하나 소인배들의 그것은 불필요함을 피력하였다. 즉 “군자는 군자끼리 ‘도’를 같이하여 붕당을 만들고, 소인은 소인끼리 ‘이익’을 같이하여 붕당을 만든다. 소인들은 봉록과 이익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낸다. 그러니 이익을 위해 뭉치지만 얻을 게 없으면 흩어지기에 소인의 붕당은 가짜다.

반면에 군자는 도의를 지키고 충신을 행하고 명예와 절조를 아끼므로, 군자의 붕당은 도를 함께 하고, 서로 도움을 주며, 국가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는 취지다. 

이런 견해들을 참고하자면, 현재 우리 패거리 정치는 소인배들의 이익집단이다. 국가·민족의 이익이나 장래엔 무관심하다. 오로지 파당의 생존과 승리만 추구한다. 따라서 ‘허물은 숨겨주고 좋은 행위는 드러내 주는’ 관용은 없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순방 중 비속어 해프닝이 있었다. 그 기회를 대역전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야당 측의 폄훼의 언설. 이를 신속 과장 보도한 언론. 서글픈 일련의 말 잔치를 지켜보며 언어의 품격을 생각해본다.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정치적 몸이다. 일거수일투족이 공적인 것이기에 품위 없는 언어에 국민들은 안타까워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했던 정치인도 ‘언어의 품격’을 논하나, 글쎄 그것이 그런 순간적 말재주에서 나오는 것일까. 패거리에 숨지 말고, 평소의 개인적 언어습관 여하를 점검해볼 일이다.

최재목 논설위원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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