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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아랍 서예의 아름다움, 디지털로 날아 오르다
[글로컬 오디세이] 아랍 서예의 아름다움, 디지털로 날아 오르다
  • 정진한
  • 승인 2022.10.1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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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정진한 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두바이 미래 박물관 외관의 아랍어 캘리그라피다.  사진=둘라의 아랍이야기

지난 7월 말 사우디아라비아의 박물관 문화 협회장 하산 타히르가 공개한 10개의 신축 박물관 명단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다들 사우디 최고 수준의 시설로 이슬람의 계시부터 홍해 무역과 이슬람 성지순례처럼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쟁쟁한 테마를 전시하고 있지만, 현 실세 왕세자는 아랍 서예 박물관에만 자신의 이름을 부여했다. 이처럼 아랍의 캘리그래피는 한국에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이슬람 예술의 정점이자 자부심이며 동아시아의 한자 서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서예의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2021년 유네스코는 아랍어 서예의 지식, 기술, 관습을 유네스코에 대표 무형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아랍어보다 먼저 대표 무형유산으로 등록한 캘리그래피는 한자(2009년), 조지아어(2016년), 아르메니아어(2019년)뿐이며, 아랍어 서예와 같은 해 대표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터키의 ‘Husn-i Hat’(터키 내 이슬람 예술 속 전통 캘리그래피) 역시 아랍 문자를 기반으로 한다. 즉, 유네스코가 무형문화유산으로 가치를 공인한 서예의 근 절반은 아랍어 서예를 기반으로 한다. 

이토록 아랍어 서예가 발달한 것은 이슬람의 문화에서 기인한다. 이슬람은 우상숭배를 금지하기에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회화나 조형물로 표현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이슬람 예술은 식물이나 기하학무늬를 단순화시켜 반복하는 아라베스크와 더불어 아랍 문자를 다양한 미학적 기법으로 표현한 캘리그래피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지난 1400년간 이슬람 세계 전역은 여타 문명에서 정물이나 실사로 표현하는 예술의 상당 부분을 서예로 대체했다.

또한, 아랍어의 범용성은 아랍어 서예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는 현재 세계 6대 공용어이자 4억여 아랍인들의 모국어이자, 19억 명에 육박하는 무슬림 모두가 하루 다섯 번 기도할 때마다 읊는 종교어다. 역사적으로도 아랍 문자는 수십 개 언어의 문자를 만드는 기반이 됐다. 신의 말씀을 담았다는 꾸란은 사용자의 모국어와 관계없이 반드시 아랍어로만 작성해야 하기에 각국의 무슬림들은 이를 보다 아름답게 담아낼 아랍어 서체 개발에 혼신을 기울였다. 덕분에 이슬람 이전에는 서예나 서체랄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아랍어는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예술의 경지에 올라선 서예를 선보였다.

아랍어 서예는 종이를 넘어 거의 모든 일상의 예술과 장식에 나타난다. 돌, 보석, 나무, 세라믹, 대리석 등으로 만든 카펫, 그릇, 병, 장신구 등 대다수 일용품 표면에 그리거나 새길 뿐 아니라, 서예를 입체화하여 조형물로 만드는 공예술이 발달했다. 특히 꾸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어록은 아랍 세계는 물론 그 바깥에서 이슬람을 수용한 모든 곳의 건축물들의 바닥과 벽과 천장을 장식해왔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이나 인도의 타지마할의 여러 벽은 아랍어 캘리그래피로 빼곡하다. 또한, 아랍어 서예는 헤나로 몸을 치장할 때부터 가장 성스러운 카바 신전을 덮는 커튼(키스와)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세계 곳곳에 두루 애용된다.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듯 세계 도처에는 아랍어 서예 박물관들이 즐비하다. 시리아, 터키,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등은 지난 세기부터 최근까지 전통 서예 작품과 공예품을 주제로 한 다수의 박물관을 개관했고 최근에는 모바일 박물관도 열었다. 또한, 다수의 아랍, 비아랍 국가들 역시 아랍어 서예 전통을 전시하는 박물관의 개관을 줄줄이 앞두고 있다. 창의적으로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역발상, 최첨단 미래 도시의 아이콘인 두바이는 통치자의 비전을 아랍어 서예에 담아 미래 박물관의 외벽에 제시하면서 서예가 가진 힘과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한편에서는 서예가 찬란한 전통을 뒤로하고 사그라져가는 과거의 유산일 뿐이라는 우려가 있다. 한글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아랍어 역시 외래어와 신조어, 줄임말이 넘쳐나고, 수기의 사용은 날로 줄어만간다. 아랍 문자 대신 영문자와 숫자로 소통하는 아라비지마저 대중화돼가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는 아랍어 서예는커녕 올바른 철자와 맞춤법 사용도 버거워졌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 세상이야말로 아랍어 서예의 미래다. 우리의 펜을 가져가고 자판을 건낸 스티브 잡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에서 유용했던 수업으로 단 하나, 캘리그래피를 꼽았다. 기계에 서체의 예술성을 담아 다른 제품들과 차별화된 인간적 감수성을 살린 그의 성공기처럼, 모바일부터 컴퓨터까지 디지털 기기에 사용되는 각종 아랍어 서체는 디지털세계라는 신대륙에서 한계를 모르고 성장 중이다.

내년 초 송도에 세계문자박물관이 개관한다고 한다. 여태껏 몇몇 전시회나 중동, 인도, 동남아의 전시물을 통해 부수적으로 다뤄진 아랍어 서예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진다는 소식이 반갑다. 한글날을 맞아 아랍어의 서예가 우리의 서예와 교류하는 그날을 고대해 본다.

 

정진한 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요르단대와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명교류사와 중동학을 전공했고 한국이슬람학회 편집이사를 맡고 있다. 「이슬람 세계관 속 신라의 역사: 알 마스우디의 창세기부터 각 민족의 기원을 중심으로」 등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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