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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307] 애옥하고 부끄러웠던 시절, 먹고 짜고 발랐던 ‘들깨’
[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307] 애옥하고 부끄러웠던 시절, 먹고 짜고 발랐던 ‘들깨’
  • 권오길
  • 승인 2022.10.12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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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
들깨
들깨. 사진=위키미디어

성큼 가을이 깊어지니 드디어 밭 들깨 가을걷이를 할 때가 되었다. 속담에 “들깨가 참깨 보고 짧다고 한다”란 자신의 흉은 모르고 남의 허물만 탓함을 비난조로 하는 말이고, 또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피마자) 못 놀까”란 남들도 다 하는데 나도 한몫 끼자고 불쑥 나설 때를 이르는 말이다. 

들깨(Perilla frutescens)는 꿀풀과의 한해살이풀(一年草)로 인도, 동남아, 중국 중남부 산악지대가 원산지로 여기며, 한국․중국․일본 등지에서 자생(自生)한다. 쐐기풀을 닮았고, 박하 비슷한 향이 나므로 ‘들깨 박하’라고도 하며, ‘바질(basil)’ 냄새를 풍긴다. 들깨 변종(變種, variety)으로 ‘자소(紫蘇)’가 있는데, 자소는 전초(全草)가 짙은 자줏빛이 돌며 ‘차즈기’ 또는 ‘차조기’라 부른다. 그리고 들깨는 한국․중국․일본․베트남 등지에서 요리재료로 많이 쓰이나 품종과 기후가 달라서 풍미(風味)가 각각 조금씩 다르다. 

들깨(wild sesame)는 말 그대로 인가 근처에 야생으로 잘 자라는 ‘들판에 나는 깨’가 아닌가. 줄기는 60~90cm에 네모진 것이 곧추서고, 긴 털이 많이 난다. 잎은 마주나고, 식물(포기)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十字) 꼴이다. 또 잎은 난원형으로 길이 7~12cm, 너비 5~8cm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거치, 鋸齒, serra)가 많다. 

어린 들깻잎. 사진=위키미디어

그리고 들깻잎은 잎 앞면(윗면)은 연두색이고, 뒷면(아랫면)은 자줏빛이 도는데, 밑면이 불그스레한 건 깻잎 안토시아닌 때문인데, 철분(Fe)이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들깨는 특유한 냄새와 씁쓰레한 맛이 나는데, 씨앗 기름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유료작물(油料作物)이다. 들깨는 가꾸기 수월하여 잔손질이 거의 가지 않고, 특별히 따로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 또 너무 배게 심으면 웃자라므로 전후좌우 30cm 간격으로 좀 성글게 심어야 튼실하고 빵빵하게 자란다.

또 모종을 옮기면 그땐 강아지풀, 바랭이, 명아주, 쇠비름, 참비름 같은 잡초들이 기승을 부리지만 들깨가 어지간히 뿌리 내림하여 쑥쑥 자라면 잡초들이 웬만해서 얼씬 못한다. 식물들끼리도 박이 터지도록 골육상쟁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들깨는 6월에 씨 뿌려 장마 무렵에 모판에서 뽑아 아주심기를 하는데 한 자리에 두세 포기를 모아 심는다. 그리고 씨를 뿌린 다음에는 짚이나 마른풀로 덮어 주어 물기를 보존하여 발아율을 높이고, 새들이 파먹는 것을 막는다. 또 줄기가 5cm 넘게 자라면 끝순 지르기를 해주어 새 줄기가 여럿 나오도록 한다. ‘농사는 과학이요 예술’이라 하더니만 여기도 농사과학이 숨어있었도다!

사실 깻잎 하나 따기도 힘에 부쳐 땀에 절고, 허리 다리를 골병들게 한다. 안간힘을 다해 잎잎이 따서 하나하나 차곡차곡 포개어 한 아귀가 될라치면 굵은 실이나 강아지풀 줄기로 허리를 질끈 묶어 가지런히 소쿠리에 담는다. 집사람은 개수대(싱크대)에서 겹쳐 쌓은 깻잎을 풀어 흐르는 수돗물에 싱그러운 잎을 뒤집어 가면서 일일이 정성껏 씻는다. 깻잎 하나도 이렇게 손질이 간다.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다더니만. 

그리고 들기름은 지방이 많아서, 오메가-3 지방산의 일종인 알파-리놀렌산(alpha-linolenic acid)과 오메가-6 지방산(omega-6 fatty acid)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감마-리놀렌산(gamma-linolenic acid)이 그득 들었다. 그런데 들기름은 오메가-3 지방산이 많은데 참기름은 오메가-6 지방산이 많다 한다. 또 잎에는 페릴알데히드(perillaldehyde)․페릴라케톤(perilla ketone)과 같은 휘발성 기름이 들었으니 이것들이 바로 들깨의 특유한 야릇한 방향성분으로 색다른 향기를 풍기고, 씹었을 때 개운한 맛을 낸다. 또한 들기름에는 불포화지방산이 많아서 혈중콜레스테롤 저하․항암효과․당뇨병 예방․시력 향상․알레르기질환 예방에 좋고, 특히 항바이러스성 단백질인 인터페론(interferon)을 생성하여 면역계를 항진(亢進)시킨다. 

서럽고 부끄러운 지난 세월이었지만 마냥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리고 들깻잎으로 쌈 싸 먹고 부각․장아찌․조림․김치도 만들어 먹고, 깻잎에는 비타민A․C 등이 풍부할뿐더러 무기물질인 K․Ca․Mg이 듬뿍 들었다. 뭐니 해도 독특한 향이 있어서 삼겹살을 싸 먹고, 물고기 매운탕에 넣어 비린내를 없앤다. 들깻가루는 여러 음식이나 국에 넣고, 추어탕이나 보신탕에 넣어 비림이나 누린내를 없앤다. 들기름은 나물에 넣는 멋진 양념이고, 옛날에는 들기름을 등잔불 기름으로 썼고, 그 그을음으로 먹을 만들기도 했으며, 또 페인트․니스․인쇄용 잉크․비누 등의 원료로 썼다.

또한 두꺼운 백지에 들기름을 먹여 기름 장판지를 만들었다. 아직도 또렷이 생각난다. 시골 마을의 모든 집집의 방은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엇갈리게 짠 대삿자리를 방바닥에 깔았으니 먼지가 푹푹 날기 일쑤였지. 그런데 드디어 매끈매끈한 기름 장판을 깔아놓아서 뛸 듯 좋아했던 옛날 기억 말이다. 말 그대로 너무나 애옥하게 살아 넌덜머리 났던, 서럽고 부끄러운 지난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마냥 그때 그 시절이 그립도다! 늙으면 옛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만. 

권오길 강원대 생물학과 명예교수
권오길 강원대 생물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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