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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또 겸손하라
겸손, 또 겸손하라
  • 정근식 서울대
  • 승인 2006.04.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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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에게 보내는 글

▲정근식/서울대·사회학 ©
확실히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는지, 가고 오는 사람들의 명암이 뚜렷하게 갈리고, 그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 최근 국면의 특징은 어느 때보다 정치불신의 바람이 거세고 냉소의 골이 깊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나 여당의 인기는 바닥을 기고 있으며, 반사이익 챙기기에 바쁜 야당 또한 부패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의 미래정치를 짊어지고 가야할 젊은 정치인들조차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노무현정부에서 정관계에 진출한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더 심하다.


오늘날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참여정부에 참여한 젊은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은 한데 섞여 있어서 후자들에 대한 불신의 정체를 명확히 밝힌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나는 처음부터 그들이 함량미달의 집단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누구보다 역사와 사회적 대의 앞에서 헌신적이었고, 우월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표방한 국정지표의 큰 방향은 옳은 측면이 많다.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실질적 참여가 확대되어야하고, 불균형은 좀더 완화되어야 하며, 냉전시대의 유산들은 깨끗하게 털고 가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이들을 떠받치는 젊은 스탭들에 대한 불신은 왜 그렇게 심한가. 


한국정치에서 고질적인 불신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선의지와 국제정치적 환경의 구조적 괴리로부터 오는 좌절과 섞여 있는 것이지만, 정치사회의 내부적 요인 또한 만만치 않다. 정치인들의 교체는 시민사회로부터의 적절한 비판에 의해서 추동되기보다는 정치권 내부의 경쟁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한국현대정치사에서 운동권의 정치참여는 멀리는 4.19세대의 영광과 오욕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민주화의 이행기에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실현되어왔다. 민주화운동세력의 정치입문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치열하고도 오랫동안 지속된 경쟁에 의해 촉진되었다. ‘수혈’대상이 되어 정치에 입문한 새로운 ‘피'들은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정치적 자원으로 하지만, 이들이 정치적 이념보다는 지역주의라는 요인에 따라 여야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이념과는 다른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과도한 경쟁에서 오는 고비용 구조에 의해 쉽게 오염되었다.


노무현정부에서 젊은 운동권의 정치중심으로의 진입과 이에 대한 반감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노무현정권은 출범당시 남북화해를 더 발전시켜야한다는 강박, 김대중정권이 IMF 사태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범한 무리한 정책들의 부정적 유산을 안고 출발했다. 또한 2002년의 선거는 확실히 지역간 경쟁을 넘어서서 이중적 의미에서 세대간 대결의 측면이 강했다. 정치의 중심이 70대로부터 60대를 건너 50대로 급속하게 이동함으로써, 패배한 60대와 보수층의 정치적 의사를 어떻게 체제내화할 것인가, 그리고 1997년 체제에서  만들어진 ‘386’의 부정적 담론효과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노무현정부의 젊은 정치그룹들의 실패는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의 저항 탓만은 아니다. 노무현정부는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참여’를 국정지표로 내세웠으나 이 참여는 모두에게 개방된 것이 아니다. 일부는 스스로 선택하기도 하고 ‘기득권세력’으로 규정되어 배제되었다. 이들에 대한 배제는 한편으로 반란으로 되돌아왔고 다른 한편으로 지지기반의 확산을 막았다.


나는 이들이 관념적 이상주의에 기울어진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타협과 조정보다는 자신들이 믿는 원리에 집착하였다. 정치민주화의 제도화과정에서 김대중 정부가 권위주의 세력의 한 분파와 손을 잡은 후에야 겨우겨우 성립했다면, 노무현정부는 민주화운동 세력 스스로 창출한 정권이었고, 여기에서 오는 자부심이 쉽게 자만심으로 나가게 만든 한 요인이지 않았을까. 이들은 반세기가 넘는 냉전의 유물과 권위주의의 구태를 벗고 우리 사회를 혁신시키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지형은 반 걸음 앞서나가는 것만을 허용하는 듯하다. 이들은 기존의 정치를 이끌어온 경제성장과 경쟁력이라는 가치와는 달리 참여민주주의나 불균형의 시정, 과거청산 등은 모두 내부적 지향을 갖는 것이어서 국민국가적 통합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낮은 정치적 의제라는 점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겠다거나 강남을 ‘문제지역’으로 돌리는 언술정치는 참여의 긍정적 효과보다 배제의 부정적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심리학에서 본다면, 선거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과 비주류 정체성이 한데 얽혀 만들어낸 묘한 약자 콤플렉스도 한 요인이다. 또한 정치적 세대비약이 초래한 60대층의 소외와 보수층의 선거연패에 대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좀더 세심하게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이 결여하고 있는 경륜이나 권위를 갖춘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자문이나 조언을 구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했다. 또한 이들은 지방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 잘 보이는 지점과 잘 보이지 않는 지점에 대해 좀더 숙고를 하여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메꿀 수 있는 장치가 부족했다. 여기에 참여 민주주의를 서로 충돌하는 이해의 조정과 균형을 통해서가 아니라 토론을 통한 직접 설득을 통해 실현하려는 오류가 더해졌다. 


나는 정치불신의 문제가 젊은 정치가 개개인들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를 정확히 짚어내는 혜안과 동시에 시민들과 함께 희망과 애환을 나눌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춘 정치집단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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