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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47] 자기실현의 두 가지 뜻
[한민의 문화등반 47] 자기실현의 두 가지 뜻
  • 한민
  • 승인 2022.11.01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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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47

 

한민 문화심리학자

자기실현에 해당하는 용어는 두 개가 있다. self-actualization과 individualization이다. 전자는 매슬로의 욕구위계이론에 나오는 용어고 후자는 융의 이론에 나오는 용어다. 비슷한 데라고는 없는 두 용어가 왜 다 자기실현으로 번역이 됐을까.(사실 후자는 개성화라고도 하지만)

심리학에는 ‘자기’라는 말과 ‘자아’라는 용어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의 정의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 문화에서는 별도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이야기다. 필자가 심리학의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인데, 서구(주로 미국)에서 발달해 온 심리학은 그쪽에서 원래 쓰던 말들을 심리학 용어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자기 또는 자아는 self를 번역한 말인데, self는 우리말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自)에 몸 기(己)를 붙이거나 나 아(我)를 붙여서 비슷한 의미를 만들었다. 그래서 self가 붙은 심리학 용어들은 ‘자기~’나 ‘자아~’로 번역이 된다. self-esteem을 자기존중감이나 자아존중감이라고 하는 것처럼.

self는 말 자체에 self가 있는 사람들이 개념화한 개념이다. 영어의 재귀용법 같은 거 말씀이다. BTS 노래에도 나오는 ‘I love myself’ 하면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self는 ‘자신’을 가리킨다. 그 언어권에서는 자기 스스로를 self로 지칭하는 관습이 있는 것이다. 즉 self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이다.

이게 그들에게는 워낙에 자연스러운 개념이다보니 그 의미도 다양하다. 보통 사회심리학에서는 self를 자기 자신이 구축한 스스로에 대한 개념으로 정의하지만, 정신역동이론에서는 자기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기라고 본다. 아시다시피, 심리학은 마음에 대한 여러 관점의 이론들이 융합된 학문으로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다른 수많은 용어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따라서 심리학 교재에서 self가 들어간 용어를 찾아보면 수십 개가 넘는데 그중에는 오늘 말씀드릴 자기실현처럼 번역 과정에서 혼란을 더하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이 보통 쓰는 자기실현은 self-actualization을 번역한 것으로 매슬로의 욕구단계 중 제일 상위 욕구인 자기실현의 욕구에 나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self를 실현, 현실화(actualize)한다고 해석할 수 있으니, 자기 향상 동기와 맞물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을 찾아 최대한 발현하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한편, 역시 자기실현으로 번역되는 individualization은 self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자기는 individual에 해당한다. individual, 개인이 실현(~ize)된다는 의미로 자기실현인데, 이때 individual은 집단에 대비되는 개인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스스로의 개성(individual)을 의미한다. 따라서 individualization은 한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존재성을 실현하는 과정, 즉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에 가깝다. 

사회가 발달하고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삶의 중심이 개인에게 이동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가문의 영광이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이유로 살아가지 않는다. 물론 거시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때도 그 의미는 나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현대사회에서 자기로서 자신다운 삶을 사는 것, 자기실현이야말로 현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방금 길게 말씀드렸듯이 자기실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을 할 것인가. 자기실현(individualization)을 할 것인가. 

다 듣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자기실현을 이루기 전에 해결돼야 하는 근본적인 전제가 있다. 바로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내(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그걸 실현하든 삶아먹든 하지 않겠는가. 사실 여기가 가장 큰 고비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와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배울래야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다.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욕구가 욕구 단계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는 이유가 있다. 융이 자기실현(individualization)을 평생에 걸쳐 추구해야 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 칭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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