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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라 지식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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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희
  • 승인 2022.11.11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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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⑩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비평사의 『전환시대의 논리』
광고 (동아일보, 1976. 10. 18.)

권력이 금서로 지정하면 이상하게 더 읽어보고 싶다. 발간과 보급이 금지된 금서를 나중에 읽어보면 권력이 감추고 싶었던 것이 드러난다. 중앙정보부는 1980년대 초반에 운동권이 읽는 불온한 이념서 목록을 작성했는데, 『전환시대의 논리』(1974)가 1위, 『8억인과의 대화』(1977)가 2위, 『우상과 이성』(1977)이 5위에 올랐다. 리영희 교수의 저서 3권이 상위권에 올랐는데 모두 암울한 시대의 금서였고 사회과학 서적인데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1974년 6월 5일에 발행된 리영희(李泳禧)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대학생의 필독서였다. 82학번인 나도 이 책을 읽고 충격을 먹었다. 저자는 지동설을 증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한 신학자 오리안더가 교회 권력의 박해를 피하려고 서문에 ‘가설’이란 궤변을 붙여 출판했다는 일화를 머리말에 소개했다. 저자의 처지를 지동설을 발설하지 못한 코페르니쿠스의 처지에 빗대, 자신의 주장이 우상화 정치에 빠진 한국 사회에 던지는 가설로 비유했다고 할 수 있다. 

창작과비평사의 『전환시대(轉換時代)의 논리(論理)』 광고를 살펴보자(동아일보, 1976. 10. 18.). 광고에서는 ‘창비신서 4’라는 시리즈 번호 밑에 저자의 인물 사진을 제시했다. 저자의 강렬한 눈매가 유난히 돋보인다. 책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쓰고 “리영희 평론집”이라 설명한 다음, 국판 양장본 335쪽에 책값은 1,500원이란 정보를 제공했다. “아시아, 중국, 한국”이란 부제가 있으니 동아시아권에 전환시대의 논리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보디카피는 이렇다. “그때그때 잡지의 청탁에 따라 씌어진 20여 편의 논문과 에세이들을 모은 것이 이 책이다. 그런데 일관된 체계를 갖지도 않은 이 저서가 왜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새 독자를 개척하며 장기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굳히고 있는가? 그것은 ‘혼탁한 정치의 기류를 고발하는 양식과 지성의 용기’(노재봉 교수)가 이 저서의 밑바닥을 일관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노재봉 교수의 평가를 인용해 책의 가치를 강조했다. 

당시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전혀 다른 진실을 마주하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문제적인 글은 베트남 전쟁을 다룬 두 편의 논문이다. 저자는 미군의 통킹만 사건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정의로운 전쟁이라 인식하던 사회의 통념을 비판하고,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설명했다. 1965년부터 파병한 한국 정부도 베트콩을 무찌르려는 정의로운 성전(聖戰)이라 홍보했으니, 저자는 정부의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초판의 표지 (1974)

세월이 흐른 다음 저자의 주장 모두가 역사적 진실로 확인됐다. 사회주의권의 자료를 인용하지 않고, 미국의 공작에 따라 전쟁이 시작됐고 미국이 승리할 수 없다는 미 국무부의 공식 문서를 근거 자료로 제시했으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유엔은 베트남전을 더러운 전쟁(dirty war)으로 규정하고 참전하지 않았다.

언론인 안병찬은 옛 한국군 주둔지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가 고통스런 표석(表石)이라며, 한국의 참전이 반공의 십자군이냐, 미국의 용병이냐, 압축 성장의 자금줄(달러 수입)이냐, 라는 삼중성이 있다고 진단했다(안병찬, 「상처의 땅 적시는 양심의 눈물: 베트남 현지 취재」 시사저널, 2001. 7. 12.). 

저자는 당시에 쓰던 냉전 용어가 나쁜 선입관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혈맹’이라 표현하며 사회주의권을 ‘북괴’ ‘중공(中共)’ ‘괴뢰’라 표현하면 정치적 편향성을 유발한다고 했다. 미국의 패권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이 책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정치나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설명한 대목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맹목적으로 거부하기보다 이성적으로 연구해야 민주주의의 길이 열린다며 독자들이 개안(開眼)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독자들은 정부에서 주입하는 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비판 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다른 생각을 억압하던 시대에 다르게 생각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 이 책은 권력의 지배 논리나 이념의 지향에 따라 역사적 진실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깨닫도록 하면서, 우상과 선입견을 깨는 비판 의식을 가져야한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저자는 사회과학이 성립되기 어려운 여건에서 ‘가설의 해설서’에 지나지 않는다며 책의 가치를 낮췄지만, 중국의 문화대혁명 부분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정설에 가깝다. 프랑스의 <르 몽드>지가 리 교수를 ‘사상의 은사’라 묘사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으리라. 침묵하던 지식인의 잠을 깨운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시 읽으며,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에 생각의 전환 논리를 찾아야겠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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