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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48] 현지화에 대한 오해
[한민의 문화등반 48] 현지화에 대한 오해
  • 한민
  • 승인 2022.11.16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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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 문화심리학자

중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들이 종종 하시던 말씀이 있다. “영어가 한국 와서 고생한다.” 영어는 영언데 영어권에서 쓰는 표현이 아니라 한국식 영어인 소위 콩글리시들을 지적하며, 또는 영어시험을 못 본 친구들을 야단치는 맥락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치맥(chimaek), 대박(daebak), 오빠(oppa), 누나(noona) 뿐만 아니라 대표적 콩글리시인 파이팅(fighting)과 스킨쉽(skinship) 따위의 말들도 영어사전(옥스포드)에 등재되는 날이 올 줄은 그땐 몰랐다. 

예전부터 선생님들은, 교수님들을 포함해서, 외국의 것이 한국에 들어오면 뭔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질된다는 인식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기독교 등의 외래 종교도, 민주주의와 같은 서양 사상도,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의 모습도 한국에서는 뭔가 부정적으로 흘러간다는 식이다. 가장 얼척이 없었던 말씀은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의 만우절 비판이었다. 

학창 시절, 만우절은 빡빡하던 입시생활에 지친 학생들이 한숨 돌리는 날이었다. 만우절이 돌아오면 우리는 다른 반하고 반을 통째로 바꾸거나 책상의 앞뒤를 바꿔놓기도 하고 선생님 들어오시는 문 위에 분필지우개를 올려놓는 등의 장난을 쳤다. 수업하지 말고 놀자고 떼를 쓰기도 했었다. 선생님들도 이날 하루 정도는 아이들의 어리광을 못이기는 척 받아주셨는데 유난히 까칠했던 윤리 선생님 수업이 문제였다.

이 양반은 그냥 노래 부르고 놀자는 우리의 요청에, 너희들 만우절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만우절이 무슨 날인지 알면 이렇게 생각 없이 이럴 수는 없다. 왜 우리나라에서 만우절이 이렇게 됐는지 정말 알 수가 없고 슬프게 생각한다는 말씀으로 한껏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셨다. 나중에 찾아봤지만 만우절은 서양에서도 그냥 악의 없는 거짓말로 장난이나 치는 날이었다. 선생님이야말로 만우절을 무슨 날로 알고 계셨는지 의문이다.

문화는 전파되고 전파된 문화는 기존 문화의 영향으로 ‘현지화’되기 마련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래되었고 토착화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되었다. 한국의 절에는 삼성각(三聖閣), 또는 산신각(山神閣)이란 건물이 존재한다. 산신 등 한국인들이 원래 믿던 신앙의 대상이 불교에 포함된 모습이다.

이스라엘인들이 믿던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유럽의 전통적인 문화와 융합하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카톨릭)이 되었다. 성경 어디에도 성상을 만들라거나 신 아닌 사람들을 성인으로 섬기라는 말씀 같은 건 없다. 외래 문화가 토착 문화와 만나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현상을 전문용어로 습합(習合)이라 한다. 

생각해보면 영어는 한국에 와서 고생을 한 적이 없다. 콩글리시는 한국인들의 언어 습관이 영어라는 언어를 만나 새로운 방식의 영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가 아닌 모든 나라에는 자기들 나름의 영어표현이 존재한다.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누군가의 멸시나 비웃음이 될 이유가 없다.

종교나 민주주의 등 외국에서 전래된 다른 것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에서는 조용히 기도하고 예배드린다고 노래하고 춤추는 한국의 예배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에는 언제나 음악과 노래, 춤이 있어왔고 때문에 한국인들은 새로 유입된 종교에서도 그런 걸 해야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3년 가까운 시간을 방안에 처박혀 보내야 했던 청춘들이 필요했던 건 나가서 놀 수 있는 이유였고 방역이 해제된 2022년 10월, 핼로윈은 그 이유에 불과했다. 애기들이 귀신 가면 쓰고 사탕이나 주고받는 핼로윈이 한국에서 성인들이 모여 술마시고 파티하는 행사로 ‘변질’됐고, 그런 어떤 부적절한 욕망을 좇아 모여든 무리들이 시민의식을 상실한 채 무질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니. 세상에 이렇게 무지하고 오만한 인식이 있을 수 있을까.

지식인들의 역할은 외국의 발달한 문물을 수입하여 그것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풍토와 현실에 맞게 변형하고 적용할 방도를 찾는 데 있다. 하물며 핼로윈이야 유래가 어쨌건 모여서 놀자고 있는 날 아닌가. 사회적 참사에서 요구되는 일은 진심어린 추모와 애도, 그리고 철저한 책임규명과 재발 방지의 약속이지 이게 원래는 뭐였다는 개인적 식견의 자랑이 아닐 터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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