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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도 생각한다···코로나19가 가져다 준 포스트휴먼의 시선
세균도 생각한다···코로나19가 가져다 준 포스트휴먼의 시선
  • 최승우
  • 승인 2022.12.07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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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㉘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과)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12일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과)가 「팬데믹 시대의 개인과 사회」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9강은 안동일 연세대 교수(보건대학원)의 「보건의료 기술과 국제 보건」, 제30강은 김환석 국민대 명예교수(사회학과)의 「생명정치, 자유와 연대」, 제31강은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의 「에너지와 지구의 미래」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우리 사회의 역량은 발전주의를 넘어 새로운 생태주의적 감수성으로 진화한다. 이는 우리가 미래를 희망할 수 있기 위해 중요한 가능성이다.“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낯선 풍경의 재난이 펼쳐졌다. 전대미문의 사태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리는 극미한 존재가 인간 사회를 이처럼 심층적으로 바꿔나가리라는 사실을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다.

2019년 12월에 중국 우한시에서 최초 보고된 코로나19는 2022년 8월 26일 현재 세계적으로 모두 5억7천400만 명 이상의 확진자를 낳았고, 한국에서는 2천280여만 명의 확진자와 2만6천413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재난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사유를 강제당한다.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밀린다. 이 과정에서 재난은 그 이전에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특정 존재의 역량을 집합적으로 식별하는 계기를 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난을 일으킨 행위자를 찾고,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통치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재난이란 무엇인가? 사유와의 관계에서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우리는 재난 속에서 무언가와 만나고, 그것의 정체를 사고하고, 그것과의 관계를 모색한다. 21세기 분자생물학자는 인간이 바이러스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이러스가 ‘선택’하고 ‘선호’하고 ‘학습’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에게 모종의 ‘지성’이 있다는 얘기다.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과)는 “재난이 일어나면 우리는 사유를 강제당한다.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밀린다”라며 “이 과정에서 재난은 그 이전에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특정 존재의 역량을 집합적으로 식별하는 계기를 준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생물학자 니컬러스 머니는 인간뿐 아닌 모든 생명체가 생존에 필요한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곤충들도 사고하고 판단하며, 두뇌도 신경세포도 없는 곰팡이 역시 양분을 얻는 과정에서 학습능력을 보여준다. 단세포 조류나 균류 군집 역시 화학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느끼고, 생각하고, 소통한다.

진화생물학자 린 마굴리스 역시 인간중심주의와 데카르트적 기계론을 비판하면서, 미생물이 어떻게 감각하고 미래를 선택하는지를 보여준다. 미생물은 열을 감지할 수 있고, 빛을 식별해 이에 반응한다. 자기장을 탐지하기도 한다. 세균에게도 의식이 존재한다.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 역시 “감각, 선택, 마음”의 능력이 갖춰져 있다.

스튜어트 카우프만 또한 행위 능력을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좀 더 원형적인 생명 속에서 행위능력의 기초적 양상들을 찾아낸다. 그에 의하면, 세균에게도 행위 능력이 있다. 

포스트휴먼 관점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 세계를 보는 기준을 삼지 않고, 세계에 가득 차 있는 저 무수한 행위자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진지하게,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행위자로 승인하는 태도다.

팬데믹 기간 동안 다수의 사람들이 알고자 했던 것은 확진자들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으며, 어디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누구와 접촉했는가 등에 연관된 것이었다.

그것은 확진자들이 그린 동선, 그들이 만드는 감염 네트워크의 지도였다. 불안한 시민들이 바라본 사회는 영토나 구조가 아니라 선으로 구성된 망, 즉 일종의 네트워크였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는 위협적이며 강렬한 감염 네트워크라는 형태로 체감됐던 것이다. 네트워크란 무엇인가?

네트워크는 다수의 노드가 링크로 연결돼 만들어진 망상 조직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두 지점은 물리적 공간과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가령, 전화로 뉴욕의 친구와 통화하는 사람은 바로 일 미터 옆에 있는 이웃 사람보다 수 천 킬로미터 밖의 친구와 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반대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않은 곳은 아무리 가깝다 해도 어떤 공유된 세계도 갖지 못한다. 네트워크는 미시와 거시의 구분,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며, 사회를 “섬유, 실, 철사, 끈, 밧줄, 모세관”과 같은 형태로 바라보게 한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우리는 사회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 대신 이런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를 체감하기 시작했다. 뒤르케임에 의해 대표되는 근대 ‘사회’는 (국민-국가 내부에서) ‘구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 전염 과정이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그리고 시민들이 팬데믹의 삶을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적 상상은 뒤르케임적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가브리엘 타르드가 구상한 사회의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

타르드에 의하면, 사회는 실체도 구조도 시스템도 아니다. 사회는 어떤 에너지가 흐르면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모방 방사들의 네트워크다.

사회를 이루는 주된 에너지로서 타르드는 믿음과 욕망을 거론한다. 이 에너지들은 바이러스적으로 전파되면서(모방) 서로 간섭하고 굴절되며 뻗어간다. 타르드에게서 사회는 ‘영역’이 아니라 ‘네트워크’ 혹은 ‘유동체’의 이미지로 포착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되는 연결선들의 집합, 서로 다른 연결의 수, 강도, 에너지의 차이를 가진 무수한 연결들의 어셈블리지, 이것이 사회의 실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사회성과 바이러스성은 매우 흡사하다.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의 모색은 20세기 사회 이론의 핵심 과제였다. 그런데, 이제 그 근대적 사회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성을 사고하는 것이 21세기 사회사상의 또 다른 과제로 주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보여준 것은 안전이 어떻게 공적이고, 정치적이고, 집합적인 가치가 돼 ‘나’의 안전을 넘어서는 ‘우리’의 안전, 그리고 좁은 의미의 ‘우리’를 넘어서는 안전으로 진화할 수 가능성이었던 것이 아닐까? 

즉, 인간-너머의 존재들로 확장되는 어떤 ‘함께-살아남기’의 사상, 그 씨앗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뿌려진 것일 수도 있다. 아직 한국 사회는 생태 감수성도 낮고, 기왕의 발전주의의 힘이 너무 강력해 세계를 여전히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경제적 영토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 지배적인 것이 영원히 지배적인 것으로 남을 까닭은 없다. 빠르게 변화하고, 역동적으로 진화하는 우리 사회의 역량은 발전주의를 넘어 새로운 생태주의적 감수성으로 진화한다. 이는 우리가 미래를 희망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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