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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 사회, ‘왜곡·오해’만 불러온다
차단 사회, ‘왜곡·오해’만 불러온다
  • 오명숙
  • 승인 2022.11.2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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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숙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

# 01. 
10.29 이태원 참사 한 달여.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경을 밝혔다. 국가가 애써 마련한 ‘무명’의 분향소에서 맘 놓고 울 수조차 없었다는 유족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무엇이 이들을 그리 두렵게 했을까. 국가는 유족과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 것일까. 자식을 잃고도 슬퍼하는 것조차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변죽만 울리는 정부 

국가의 애도 기간 내내 본질이 아닌 것들이 변죽을 울려댔다. 수사기관은 ‘토끼 머리띠’를 찾아나섰고, 해당 구청장은 이태원 참사를 ‘현상’이라고 하더니, 행안부장관은 경찰국을 신설해 놓고도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고 유족들의 명부가 없다고까지 발뺌한다. 정부는 굳이 이 사태를 축소(?)키 위해 애석하게도 억지 논리를 끌어다 댔다. 

이태원 참사가 아니라 ‘사고’로,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로, 검은 리본의 ‘근조’는 빼라며. 정부의 이런 정책에는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유족과 1:1 면담, ‘신속한 조치’를 정부는 강조했다. 아마 세월호 유가족들처럼 될까봐 두려운 듯했다. 유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동병상련의 위로조차 나눌 수 없었다. 책임지는 이는 없고 정부는 ‘잊혀질’ 시간을 기다리는가 보다. 

 

할로윈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던 이태원 모습(2022년 10월 29일). 사진=위키백과

밥상에 올릴 문제는 

이에 몇몇 언론과 종교계에서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이를 두고 정부는 갑자의 유족의 입장으로 돌아서 대변자가 되었고, 명단 공개를 주도한 언론을 공격했다. 유족의 애끓는 심정을 전하는 기사는 BBC 말고는 찾기 어려웠다. 기자회견 전까지는. 유족들은 ‘가만히 계셔라, 정부가 다 알아서 해 줄테니’. 정부는 아마도 이들 유족들을 집단화하지 못하도록 개별 ‘관리(?)’하는 듯했다. 

이들이 한 데 있으면 안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마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국가 부재의 사태를 만들어낸 정부의 책임, 그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유족들이 서로의 눈빛을 보면서 슬픔을 쓰다듬을 수 있는 공간마련, 그게 최우선의 할 일이다. 그런데 유족들을 또 다른 위험에 빠뜨리는 정부. 혼자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심리전문가들의 조언에는 귀를 막고 있는 정부. 왜 그러는 것일까. 

정작 밥상에 올릴 문제는 첫째, 유족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유족들이 기대어 서로의 ‘눈빛’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나의 일로 생각해야 한다. 둘째, 참사의 원인 즉 ‘국가 부재’의 진상규명이다. 사회적 혐오가 일어나지 않도록 언론과 시민사회가 유족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셋째, 유족들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한 공감과 배려의 문화가 필요하다. 기억만이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다. 이태원참사 합동 추모 공원도 조성하는 것이 마땅하다. ‘산 사람’들의 반드시 해야 할 기억책임이다. 

#02.
대통령 뉴욕 발언은 생명력이 길다.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통령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던 비속어발언을 다시 호출했다. 대통령의 ‘악의적, 가짜 뉴스,  이간질, 동맹관계 훼손’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문화방송(MBC)이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핵심은 ‘바이든’ 자막을 단 게 문제라는 것인데, 국민들은 이제 남은 존경심도 없는 모양새다.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누가 사실을 왜곡하고 억지를 부리며 고집을 피우고 있는지를. 게다가 국민을 위해 주어진 권한을 적절한 곳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도 ‘미운 오리(?)’잡기에 급급하다는 것도. 문화방송이, 야당이, 대통령의 ‘눈에 가시’가 된 이유를 생각해보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생긴 일 

어처구니는 본래 맷돌의 윗돌에 끼워져 있는 수직의 손잡이다. 이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에 곡식을 갈 수 없다. 나무로 만든 어처구니를 잡고 무거운 맷돌을 빙글빙글 돌리면 곡식을 곱게 갈아낼 수 있다. 작은 도구이지만 그 역할은 결코 적지 않다. 상당한 무게의 돌덩이 맷돌을 움직일 수 있는 막대, 어처구니의 힘은 강력하다. 그럼 대통령실의 ‘어처구니’는 무엇이 될까.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비행기에 문화방송 ‘탑승금지’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대다수의 평자는 말한다. 이때의 어처구니는 ‘어이없다, 황당하다’는 표현이다. 평자들은 문화방송 해외순방 비행선 탑승금지 조치가 대통령의 판단으로 적절치 않았다고 입을 모아 역설했다.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언론자유에도 해당되지 않는다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쓰는 표현은 후자에 해당된다. 이 글에서는 전자의 어처구니의 개념을 적용하고자 한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대통령실)에 필요한 어처구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뉴욕의 비속어 논란이나 대통령 전용기 문화방송 탑승불허 건, 도어스태핑 중단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태도가 있다. ‘진실과 사실, 인정’ 등 객관은 드러나지 않고 ‘과도한 해석과 감정’ 이 의사결정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대통령실에 어처구니에 해당되는 의사결정의 기준이 될 ‘공감ㆍ연민ㆍ이해’가 없는 듯하다. 

빗장과 둔테 

우리는 솟을대문을 열고 닫을 때 빗장을 좌우로 움직여야 한다. 이때 둔테가 양 옆을 잡아 주지 않으면 빗장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그 둘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떠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늘 함께 공존해야만 하는 공생의 관계, 조응의 관계, 협응의 관계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 국가와 조직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슬픔과 우애를 느낀다. 관계 속에서 불편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흔히 우리는 공격심을 갖게된다. 상대를 누르고 싶어지고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쓰고 싶어진다.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상대를 쓰러뜨림으써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욕구를 품게되고,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전쟁은 이런 시점에서 발생한다. 양자를 갈라 놓으면서 ‘편’을 만든다. 중간지대는 없다. ‘죽음’을 문 앞에서 만나게 된다. 

공감은 상대의 말을 경청할 때, 상대의 눈빛을 마음을 비우고 바라 볼 때, 상대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돌아보고자 할 때 비로소 느낀다. 연민은 상대도 ‘나’와 같은 존재이며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보면, 대립했던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해는 상대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데서 가능한데, 정서교류가 촉진제 역할을 한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들이 배려심을 더 잘 표현하듯이 이해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아량의 마음에서 발현된다. 

차단(exclusion)사회는 왜곡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맷돌에서 어처구니를 뽑아버린 듯한 국정운영의 실상을 목격한다. 빗장과 둔테가 서로에게 의지하여야만 하듯이. 상호관계 속에서 존중의 자세와 공동의 목표가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실험대에 놓여 있다. 그 과정이 다소 괴롭고 힘들더라도 우리 대한민국의 아픈 성장을 기대할 밖에.  

 

 

 

오명숙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문화교육, 평생교육, 박물관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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