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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학문의 소멸 속도가 가장 빠르다
기초학문의 소멸 속도가 가장 빠르다
  • 안상준
  • 승인 2022.12.19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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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안상준 논설위원 /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안상준 논설위원

수도권 소재 사립 M대가 사학과를 인접 학과에 통합시키는 결정을 통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순간 저절로 ‘이제 수도권 대학마저!’라는 탄식이 필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부산에 제법 큰 사립대학이 많지만, 국립대인 부산대와 부경대를 제외하고 사학과는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몇 해 전 사학과가 통폐합되어 교양학부로 소속을 옮긴 지인이 전한 말이다.

2020년의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인문계열의 학과 수는 976개에서 828개로, 입학정원 수는 4만6천108명에서 3만7천352명으로 줄었다. 

기초과학 분야의 사정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비수도권 사립대학 대부분은 벌써 자연과학대학 자체를 해체했다. 이제는 중소도시 소재 국립대학들이 기초과학 학과들의 존폐를 둘러싸고 신중한 논의를 진행하는 중이다.

실제로 모 국립대의 자연과학대학은 신입생 미충원으로 어려움을 겪는 소속 학과들이 학사구조 개편이라는 회오리바람 속에 공과대나 사회과학대로 이적을 결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체된다고 한다. 비수도권 사립대의 기초과학 분야 교수들이 재직 중에 여러 차례 소속이 바뀌어 겪은 곤혹스러운 경험담은 이제 예사로이 들릴 지경이다. 

종종 이런 소리도 들려온다. “대학이 그렇게 많은데 좀 줄여도 되지 않을까?”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대학 같지 않은 대학이 많다는 지적에도 반박하기 쉽지 않다. 문제는 대학 같지 않은 대학을 폐쇄하는 대신 대학다운 대학들이 학생 충원의 유리함을 내세워 철학, 역사, 수학, 물리 등 기초학문을 버린다는 점이다. 국립대의 철학과가 사라지고 자연과학대학이 자진 해산하는 상황은 옳은 방향이라고 보기 어렵다. 

조용히 넘어갔지만 2022년은 국제연합(UN)이 지정한 ‘세계 기초과학의 해’였다. 이런 추세로 보아 유엔이 걱정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기초과학이 위기를 맞은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기초학문 소멸의 속도는 너무 빠르다. 인구의 소멸, 지방의 소멸, 마을의 소멸 등등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소멸의 위기 가운데 필자가 보기에는 기초학문의 소멸 속도가 가장 빠르다. 

기초학문 분야가 이토록 빠르게 소멸되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기술의 원천지식을 누가 탐구하고, 존엄한 삶과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한 이념과 제도는 누가 제시하는가? 생각하는 인간을 배출하지 않는 사회, 과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 사회, 자연의 이치와 물리를 궁극까지 탐구하는 연구자가 많지 않은 사회는 과연 언제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초학문 분야의 연구와 교육 역량은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일단 기존의 인프라가 훼손되면 회복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건 자명하다. 우리나라가 추격형 국가 프레임을 벗어나 선도형 국가를 구현하려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단언컨대 기초학문이 빠르게 고사하는 지금의 상황을 방치한다면 대한민국이 선도형·성숙형 국가로 진입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학령인구가 줄어도 초중등 교육과정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의무교육을 위한 정부의 행·재정적 지원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대학 운영에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되어야만 한다. 대학 기초학문 분야가 완전히 고사하기 전에 정부는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기초학문 분야의 학문생태계를 조속히 복원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다. 이제라도 이미 발의되어 있는 ‘기초학술기본법’이나‘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가 오랫동안 준비하고 현재 유기홍 국회교육위원장과 협의 중인 (가칭)‘인문사회기본법’이 제정되면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고 희망이 보일 듯하다. 

안상준 논설위원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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