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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숫자뿐이다
오로지 숫자뿐이다
  • 윤영국
  • 승인 2022.12.19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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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국 서울대 기계공학부 박사과정

 

“바둑에 신이 있다면 그의 눈에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전부 가소로운 것들로 비칠 것이다. 신의 눈에는 오로지 정수와 악수밖에 없다.” - 서봉수 9단

혹시 체스를 둬 본 적이 있는가? 둔적이 없다면, 한 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굉장히 재밌는 게임이다. 
유의할 점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두는 ‘존재’가 되는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굳이 사람이 아니라 존재라고 한 이유는, 이미 1997년 5월 11일, IBM의 딥 블루가 당시 체스 세계 챔피언이었던 가리 카스파로프를 6전 2승 3무 1패로 이기면서 소위 말하는 ‘신’의 반열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스톡피시(Stockfish)라는  오픈 소스 체스 엔진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사실상 신의 타이틀은 영원히 인간이 되찾아 올 수 없게 되었다. 바둑 역시 2016년 3월 15일,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상대로 5전 4승 1패라는 기록을 보여줌으로써 순수한 수읽기의 영역에서 인간은 절대 기계를 앞설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실 이미 오래전에(아마도 알파고의 승리 그 직후)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이야기라 지면을 낭비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체 기계라는 분야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흡인력 있게 이야기하기 위해 부득불 이런 선택을 한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유체 기계에서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다름 아닌 전산 유체 역학(Computa-tional Fluid Dynamics, 이하 CFD)이다. 

처음 연구실에 발을 들인 이래, 진지하게 유체 기계(그중 터보 기계)를 공부하기 시작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CFD의 작동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신기하다. 물론 이 신기함에는 실험을 주된 연구 방법론으로 택한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생경함이 많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압축기의 형상 정보와 회전 속도를 입력하고 적절한 경계 조건을 주면 몇 분 뒤에 압축기의 성능 계수 및 모든 내부 유로에서의 유동 정보가 산출되는 것이 어떻게 신기하지 않겠는가. 

만약 유체의 수를 읽는 대회가 있다면 CFD는 곧바로 신의 칭호를 달게 될 것이다. (CFD의 코드 및 인터페이스를 습득하고 활용하느라 엄청난 공력을 들인 연구원들과, CFD의 기저에 놓여있는 지배 방정식의 정당성 및 수치 해석 방법의 효율성을 위해 수많은 뉴런을 혹사한 또 다른 연구원들의 이야기는 괄호 안에 묶이게 되었다. 그들은 참으로 지적인 존재들이며, 이 글에 언급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진심 어린 사과를 드리고 싶다.)

순수한 계산 시대의 개막

이쯤 되면 도대체 왜 내가 레지스탕스의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다시금 체스로 돌아가 보자. 신의 등장 이후, 인간이 가진 창의력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주어진 체스 포지션에 대해 평가할 때 사용했던 전략적 요소들은 서서히 그 빛을 잃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순수한 계산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체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달갑지 않은 것은 없는데, 첫 번째는 실력을 결정짓는 요소가 획일화됨으로써 체스가 더는 질(質)적인 게임이 아닌, 양(量)적인 게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체스를 파악(把握)하는 데 필요했던 어떠한 체계들이 내 손에서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최근 유체 기계 분과에 출판되는 논문들을 살펴보고 있자면, 동일한 추세가 해당 분과에도 침습하고 있다는 기분을 숨길 수 없다. 그 많은 정보를 신이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체가 ‘어째서’ 이렇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은 오로지 숫자뿐이다. 

그 숫자들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중의 하나인데, 정말 단순한 계산 결과이거나, 애석하리만치 유체 외의 다른 학과들과만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유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점이 속상하다. 유체가 가장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공간을 그토록 애써 구현해 놓고, 더는 유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 는다는 것. 이것이 필자가 레지스탕스를 자처하게 된 좀스러운 사연이다.

윤영국 서울대 기계공학부 박사과정

액체 로켓 터보펌프 인듀서에서 발생하는 캐비테이션 불안정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유체를 공부하다 보면 스스로가 왜 유체에 매력을 느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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