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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여야 하나, 연구자여야 하나
창작자여야 하나, 연구자여야 하나
  • 박지희
  • 승인 2022.12.26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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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박지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처음으로 문창과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건 고2 때였다. 대학에 그런 과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문창과에 대한 정보는 학교나 학원에서 주워들은 게 아니라 장정일 소설을 통해서였다. 나는 『아담이 눈뜰 때』의 주인공에 잔뜩 이입된 나머지 ‘나’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그 학과를 대신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창과에 대한 나의 열망은 주인공이 “타자기”와 “뭉크 화집”과 “턴테이블”에 대해 가진 열망만큼이나 맹목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막연하게 글이 쓰고 싶어서 문창과를 택했다. 

‘문예창작’은 고전적인 인문학과 달리 신생 학문에 속한다. 내가 몸담은 숭실대 문창과도 1998년에 첫 신입생을 받았다. 서라벌 예대에 문창과가 생긴 게 1953년인데 무슨 말이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기준은 문창과가 양적으로 급증한 시기가 2000년대 전후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생 학문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문예창작’은 ‘문학예술’과 ‘창작활동’을 줄여 이른 말로서 이미 태생부터 인문과 예술이 어우러진 융합학문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문창과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트렌디한 학과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문창과는 고전적으로 문인을 기르는 게 목표다. 그래서 이론보다는 실기 위주의 수업이 대부분으로 학생 본인의 작품 창작과 합평이 주요 수업 내용이다. 대학원에 들어와서도 창작 수업이 이론 수업보다 훨씬 많다. 즉, 수업은 창작 위주인데 졸업할 때는 국문과 학생들과 비슷한 형식의 논문을 제출해야 한다. 배우는 게 다른데 어떻게 같은 논문을 쓸 수 있냐는 의구심이 들면, ‘현타’의 시작이다. 

문창과 대학원생은 창작자이기도 해야 하며 연구자이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고는 수료생의 적체 현상을 가져왔다. 석사과정에 같이 입학했던 동기가 해당 학기에 세 명이었는데 그중 석사 졸업자는 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문창과가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일 수 있다. 대학원에 들어왔으니 창작자가 되기보다는 연구자가 되라는 말을 당당하게 권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문창과의 특성상 그런 권유는 쉽지 않다. 대학원생들은 연구보다는 여전히 창작 그 자체에 매달려 있다. 등단을 하지 못했다면 등단이 목표고, 등단자라면 더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게 목표다. 더군다나 연구자로 길을 정했다고 해도 문예창작학 논문을 투고할 학회지는 한 손가락 안에 꼽는다. 

내 경우는 더 난감하다. 웹소설이 주요 관심 분야인데 이건 문예창작학에서 비주류나 마찬가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문창과에서 ‘스토리텔링’을 받아들이고 관련 교과목이 신설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학문적 포션이 넉넉히 주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나 또한 최근에 웹소설 논문을 문예창작 학회지가 아닌 문화콘텐츠 학회지에 발표하였다. 연구자로서는 스토리텔링 관련 논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주는 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논문은 심사를 거쳐 어찌어찌 실었다 해도 학회 행사에 가서 만나는 신진연구자들은 문화콘텐츠학과 학생들이었다. 연구 분야를 떠나 학문후속세대라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서 금방 친해질 순 있었지만 뭔가 ‘다르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이브가 눈뜰 때

『아담이 눈뜰 때』의 ‘나’는 “뭉크 화집”과 “턴테이블”을 버린 후 “타자기”를 사기로 결심한다. ‘아담’에게 있어 “타자기”는 자아를 성장시킨 도구이자 방황의 종점이다. 그렇다면 내게 “타자기”의 역할을 하는 건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문창과다. 소설 속 주인공 ‘아담’은 문창과에 입학하는 대신 홀로 글을 쓰는 길을 택한다.

문창과라는 제도권에 들어간다는 건 속물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담’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내심 제도권의 그늘을 즐기는 속물일 수밖에 없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장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이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으로 남으려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브’로서 눈을 뜰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내부에 남아 파장을 일으키는 일, 그것은 가장 안온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불온한 일이다.

박지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3년 노조 문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5‧18 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으며 현재는 웹소설 분야의 신진 연구자로 활동 중이다. 최근에 『한국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에 나타난 신자유주의 시대 현실 재현 양상 연구』라는 소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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