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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중화주의’ 넘어 지역사를 담다…17년 만의 결실
‘오리엔탈리즘·중화주의’ 넘어 지역사를 담다…17년 만의 결실
  • 이희수
  • 승인 2022.12.29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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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더 넓은 세계사』 이희수 외 6인 지음 | 삼인 | 516쪽

기록의 역사에서 기억의 역사로 재평가하고
주체자 입장에서 지구촌 문화를 들여다보기

중국의 동북공정 책략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강탈하고,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로 국민들의 불편함과 분노가 확산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에 묘사된 다른 문화권에 대한 역사도 상당 부분 부정확하고 심지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2005년 어느 날, 제3세계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는 연구자 7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프리카, 인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라틴아메리카를 연구하는 학계의 중견 학자들이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사회과·역사과 교과서가 너무 서구 편파적이고, 종족 차별적이고, 오류와 편견이 심하다는 지적들을 쏟아놓았다. 

 

아프리카는 아예 버림받은 땅이었다가 자원 개발을 위한 미래의 땅으로 둔갑했다. 인도 역사는 우수한 고대 문명과 열등한 현재로 양분되어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역동성과 유목적 전통은 농경-정주 중심의 사관에 철저히 갇혀있었다. 동남아의 다양성과 문명 교차의 역할과 의미도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축소되어 있었다. 서아시아-이슬람 문화권은 왜곡을 넘어 적대적 고정관념의 묘사가 너무 많았다. 라틴아메리카도 야만과 문명의 틈새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세아니아 편의 제목은 ‘백인들과 양떼의 대륙’이었다.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며 글로벌 시민의식 교육이 절실한 때, 교과서의 이런 문제점들을 그냥 두는 것은 미래 세대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열띤 토론과 의견교환을 통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란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첫 결실을 출간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오류를 찾아서 분석하는 일에 머물지 말고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길잡이 책을 집필해달라는 사회적 비판과 요청이 강했다. 포부와 취지에는 모두들 공감했지만, 처음 시도해 보는 작업인 데다 객관성과 균형 감각을 갖춘 자료를 취합하고 적확하게 내용을 서술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의 오리엔탈리즘 담론과 중화주의라는 큰 산을 극복하는 적실한 자료 취합과 체계적인 역사서술이 난관으로 부닥쳤다. ‘기록의 역사’ 중심에서 ‘기억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과정과 작업도 순탄치 않았다. 그러면서 집필에 큰 원칙을 세웠다. “역사란 한 문화권 구성원 전체가 살아내간 삶의 궤적의 총체이자 그들의 절절히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총량”이라는 역사상대주의적 입장을 존중하고자 했다. 

 

각 지역의 역사에 대한 편견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사진=픽사베이

각 지역의 역사를 고대에서 오늘날까지 통사적으로 집필하되 지역 간 상호유기적 관계나 교류의 정황도 비중있 게 다루면서 글로벌 역사 전개를 강조했다. 예를 들면 15세기부터 시작되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에도 아프리카의 송가이와 말리 왕국, 서아시아의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 인도의 무굴제국, 동남아시아 베트남의 레, 태국의 아유타야, 미얀마의 떠웅우 왕국들, 라틴 아메리카의 서구 식민침탈 직전까지 번성했던 아즈텍, 마야, 잉카 문명 등을 동시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정리했다. 

꼬박 17년만에 이 책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 7명의 필진 중에 세 분이 정년을 맞으셨고, 한 분은 안타깝게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더 나은 교과서 집필을 위해 작은 참고가 될뿐더러, ‘가진 자, 지배자, 식민 강국’의 시선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절절히 만들어갔던 주체자의 입장에서 지구촌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는 관점과 염원을 담았다. 이 책은 시작에 불과하고 서로 다른 관점을 존중하면서 질책과 조언을 통해 보완, 수정되어 가기를 고대한다. 

 

 

 

이희수 
한양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
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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