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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이대녀’ 프레임 갇힌 페미니즘…그 결과는 ‘침묵의 수업’
‘이대남·이대녀’ 프레임 갇힌 페미니즘…그 결과는 ‘침묵의 수업’
  • 김재호
  • 승인 2023.01.02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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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페미니즘, 대학을 바꿔라’ 좌담
왼쪽부터 강이수 상지대 교수, 엄혜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현미 연세대 교수, 백영경 제주대 교수다. 이들은 「페미니즘, 대학을 바꿔라」 좌담에서 대학 내 페미니즘 교육과 연구, 제도적 실천 등을 점검했다. 사진=이영균/창비 제공

“여성 교수가 최소 30퍼센트여야 소수자 목소리를 벗어난다.” 강이수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과)는 <창작과비평> 198호(겨울 2022)의 「페미니즘, 대학을 바꿔라」 좌담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사립대는 4년제 기준 약 27퍼센트인데, 대부분 생활과학대나 간호대에 몰려 있다. 여성 교수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선 양적 성장이 우선 필요하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국공립대 여성 교수 비율은 19.5퍼센트다. 

여성 교수의 비율이 낮은 것만 문제는 아니다. ‘촘촘한 신분사회’ 역시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만든다. 엄혜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똑같이 ‘교수’라 불려도 고용 지위는 물론 임금 수준과 대학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자율성의 정도는 매우 다르다”라며 “이런 대학 현실에서 무언가를 같이 도모할 수 있는 기반은 붕괴된 지 오래고, 교수 개개인의 의지에만 의존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엄 교수는 “대학을 촘촘한 위계로 나누어놓은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혁의 신의 한 수”라고 일갈했다. 

그래서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과)는 “국내외 대학 평가지표에 ‘성평등’과 ‘사회적 연대 역량의 강화’라는 구체적·실천적 항목이 들어가면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며 “공동 모니터링을 통해 페미니스트가 대학에 개입하는 진입로를 열어갈 필요가 있고, 공인된 성평등 대학 평가지표를 만들어내는 일도 중요하다”라고 밝혔다. 

백영경 제주대 교수(사회학과)는 대학의 후진성을 비판했다. 백 교수는 “어느새 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기보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낙후된 공간으로 여겨지게 된 대학의 현재 위치와 모순”을 지적했다. 그래서 백 교수는 “페미니즘 관점에서 대학 현실을 짚어보는 것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대남·이대녀’ 프레임 갇힌 페미니즘…그 결과는 ‘침묵의 수업’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은 여성혐오의 범죄였다. 그런데 그 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올해 9월, 신당역에서 비슷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만남을 강요하던 피의자는 여성의 신고에 대한 보복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미투 운동이 사회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인권에 대한 노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특히 끊임없이 반복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범죄는 대학사회도 마찬가지다. <창작과비평> 198호(겨울 2022) 좌담 「페미니즘, 대학을 바꿔라」에 참가한 교수들은 한목소리로 대학 내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교육·연구·제도적 측면에서 여전히 부족하다고 성토했다. 

강이수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과)는 강의 축소를 지적했다. 강 교수는 “한때는 상지대에서 페미니즘 강좌가 ‘여성학’, ‘여성과 일’, ‘성문화의 이해’ 등 한 학기에 7∼8개까지 개설됐는데, 지난 3∼4년 사이 급격히 축소되어 지금은 2∼3개밖에 남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연세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교양대학이 아니라 성평등센터에서 만든 두 과목 중 한 과목이 없애라는 압박을 받았다. 마치 여성가족부가 폐지될 위기에 놓여 있는 현 상황과 비슷하다.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과)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젠더라는 분석 범주를 통해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여성성/남성성을 살피고 섹슈얼리티 문제를 들여다보며 차이가 왜 위계화되는지를 분석하는 학문이자 그 대안을 구성해가는 학문”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남녀 사이 발생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연구하는 핵심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여학생 비율이 늘어나면서 연세대가 불안해했던 때를 털어놨다. 그건 바로 “학교가 ‘여성화’되면 민족성·남성성이 우세한 다른 대학과 어떻게 경쟁해서 이기느냐 하는 불안”이었다.  

 

대학 내 성평등센터의 유명무실화도 문제다. 김 교수의 비판이다. “인권센터·성평등센터를 만들면, 그리고 거기 2년 단위 순환 보직인 센터장과 정규직 연구원·상담원 한 명만 두면 대학으로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곤 성폭력 예방교육 이수율을 높이는 데만 치중한다. 기구는 갖추었지만 아주 낮은 수준의 규율과 규칙, 법치주의로 환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평등센터·인권센터 장(長)을 전문성 없는 법대 교수들이 맡는 상황도 생긴다.” 그 원인에 대해 강이수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과)는 천박한 실용주의를 꼽았다.

강 교수는 “성평등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도 천박한 실용주의가 대학을 지배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라며 “제도나 평가기준에 따라 기구는 만들어두었지만,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담론을 논하는 학문적 공간은 계속 축소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인권센터가 포괄적인 업무를 다루는 곳이기는 하지만, 성평등 업무를 주로 하는 만큼 그에 맞는 인식을 갖춘 전문가가 배치되어야 하고, 학내 성폭력·성희롱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체계를 더 탄탄하게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점점 줄어들고 폐지 압박 받는 페미니즘 과목
대학 내 성평등센터·인권센터 이미 유명무실화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과 진전이 없는 건 아니다. 연세대는 총여학생회에서 교수들의 성차별적인 얘기나 농담을 계속 모니터링하면서 보고서를 냈다. 발언자를 익명으로 하면서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대학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고자 했다. 2005년도 강의평가에는 ‘성평등한 관점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는가?’라는 문항이 들어가며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과정은 학생, 교수들의 연대로 이뤄졌다. 현재는 좀 더 표괄적인 ‘비차별적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성별·인종·국적·종교 등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강의에서 진행됐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교수들이 이른바 대학에 반하며 기득권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기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교수들이 연대하기가 어렵다. 김현미 교수는 “주니어 교수들은 업적을 빨리 쌓아 불안정한 지위를 벗어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평판을 잘 관리하고 싶어 한다”라며 “대학 안팎의 사회적 이슈에 접근하거나 자기 분과를 넘어선 학제 간 연구를 해보겠다는 관심도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김 교수는 “시니어 교수들은 어렵게 그 자리에 올라간 만큼 다른 사안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아하게 퇴직’하고 싶어 하는 기류가 보인다”라며 “시니어든 주니어든 현재의 나를 뛰어넘어야 새로운 사회적 자아가 구성되고 연대가 가능한데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김 교수는 “지금은 ‘침묵의 수업’이라고 할 만큼 논쟁이 사라졌다”라고 우려했다. 그 이유에 대해 “사회에서는 이대남/이대녀 젠더갈등 프레임을, 국가 정책적으로는 양성평등 프레임을, 보수우파들은 동성애 찬반 프레임을 너무 강화해놓았기 때문에 여성학 수업에서마저 논쟁의 방법론을 잃어버렸다”라고 분석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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