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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와 아롱
세기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와 아롱
  • 김재호
  • 승인 2023.01.18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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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_『세기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와 아롱』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지음 | 변광배 옮김 | 세창출판사 | 612쪽

같은 세대를 살았고 자신이 살던 세기를 갈라놓은 두 지식인의 일대기를 살펴보는 일은 곧 그 세기의 지적 흐름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것도 그 두 명의 지식인이 같은 지적 환경에서 자랐고, 과거에 친밀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면 더욱더 그렇다.

여기, 그러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지성계의 두 거물, 아롱과 사르트르는 처음에는 ‘절친’이었고 나중에는 정적이었다. 고등사범학교라는 지적 온실에서 만난 이 두 절친은 왜 정적이 되어야만 했을까? ‘역사’가 그들에게 선택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더 명확히 말해, 그들에게는 선택이 일종의 의무로서 부과되었다. ‘역사’의 갈림길 앞에 서서, 옳은 것(le bien)을 추구했던 사르트르는 왼쪽으로 걸었고, 진실된 것(le vrai)을 추구했던 아롱은 오른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두 절친의 관계는 결국 회복될 수 없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 두 지식인과 유사한 관계를 한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그들이다. 같은 학문적 요람에서 배운 두 ‘절친’ 중 먼저 독일에 자리를 잡았던 아롱이 사르트르에게 후설을 추천했듯이, 이색이라는 스승의 문하에서 배운 두 ‘절친’ 중 먼저 인정받았던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맹자를 추천했다. 그리고 왼쪽을 향했던 아롱이 나중에는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것처럼, 개혁을 바라보던 정몽주는 왕조의 위기 앞에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반면에 ‘역사’에 유혹되지 않았던 젊은 사르트르는 왼쪽으로 향했고, ‘역사’를 유혹할 수 없었던 젊은 정도전은 ‘역사’를 손에 쥐었다. 그렇게 역사는 두 친구 중 나중에 움직이기 시작한 친구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 가까이에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러한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충(忠)을 중요시하던 조선 지성계에서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프랑스 지성계에서는 아롱이 걸었던 길이 오른쪽이었을 뿐 아니라, 옳은 쪽이기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사르트르의 옹호자였던 『리베라시옹』의 아래와 같은 기사 제목이 그러한 흐름을 잘 보여 준다. 「슬프다! 레몽 아롱이 옳았다(Raymond Aron avait raison. Hélas!)」.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는 것이 아롱과 같이 옳은 것보다 낫다(Plutôt avoir tort avec Sartre que raison avec Aron)”던 전 세기의 외침이 침묵 속에 침잠되는 순간이었다. 두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반전된 것이다. 이러한 평가의 반전에는 ‘역사’의 움직임이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역사’의 영향을 받은 두 지식인은 역사에 영향을 끼쳤고, 다시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두 지식인의 길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길 중 어느 쪽이 옳았는가에 대해서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처럼, 아롱과 사르트르 중 누가 옳았는가에 대해서 쉽게 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이 시도하는 것 역시 누가 옳았는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둘의 이야기를 종합하려 애쓰는 것이며, 이 책이 시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누가 옳았는지 밝힐 수 없음에도 그 둘의 이야기를 종합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어느 때에 누가 옳은 것으로 판정되었는가의 문제는 곧 그 세기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치 혁명을 중요시했던 조선의 건국기와 충절을 중요시했던 건국 이후의 시대처럼 말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르트르의 몰락과 아롱의 상승이 최근의 프랑스 지성계에 매력적이었던가?”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왜 금세기는 사르트르가 아닌 아롱을 옳다고 보고 있는가?” 두 지식인이 끌어안고자 한 ‘역사’가 그것을 말해 줄 것이다. 두 명의 ‘지식인’인 사르트르와 아롱은 지식인 사회에서 보면 여전히 ‘역사’의 ‘재판정’ 앞에 서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그 판결이 미뤄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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