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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도 홀로코스트를 말하는가
왜 아직도 홀로코스트를 말하는가
  • 안미현
  • 승인 2023.02.03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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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죄와 속죄의 저편』 장 아메리 지음 | 안미현 옮김 | 필로소픽 | 248쪽

강제수용소에선 초월적 사유도 소용없어
홀로코스트는 용서 아닌 원한이 올곧음

꼭 십 년 전에 출판되었던 장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이 재출간된 것은 조금은 놀라운 일이다. 이제와서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을 내는 것은 그다지 참신하지도, 발전적인 일도 아니지 않는가? 수많은 영화나 각종 매체를 통해 너무도 잘 알려진,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음울하고 식상한 주제가 아닌가? 이런 반문과 의구심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의 문제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장소와 형태를 달리하여 이 시간에도 세계의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자신의 책 제목처럼 호텔 방에서 최종적으로 ‘자유죽음’을 택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장 아메리(1912∼1978)의 대표작에 해당하는 『죄와 속죄의 저편』은 1966년에 처음 출판됐다. 이 책에는 그가 발표했던 5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정신의 경계에서」, 「고문」, 「사람은 얼마나 많은 고향을 필요로 하는가」, 「원한」, 「유대인 되기의 강제성과 불가능성에 대해」가 그것이다. 

첫 번째 에세이 「정신의 경계에서」는 인문적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미학적인 사유가 강제수용소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직접적 체험과 객관적 관찰을 담고 있다. 스스로 인문적 지식인이었던 아메리의 이 같은 자기고백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문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인문 정신은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동안 귀가 따갑게 들어온 인문 지식의 의미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이에 대한 답변은 네 번째 글인 「원한」에서 엿볼 수 있다. 아메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각적으로 행해진 화해와 용서의 시도 앞에서 스스로는 오히려 원한의 감정과 분노를 고수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화해와 용서만이 피해자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심리의 수사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한, 원한이야말로 인간성의 보다 높은 차원이며, 도덕적, 역사적 올곧음이라는 역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역설적 주장은 읽는 이들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불편한 주장은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려는 자신에 대한 부정이고, 전후 사회의 집단적 망각에 대한 거부와 저항 정신의 표현이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원한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사진=위키백과

마지막 글인 「유대인 되기의 강제성과 불가능성에 대해」는 이주의 시대, 디아스포라의 시대, 난민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 고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 문제, 그들이 겪는 언어적, 심리적, 경제적 어려움, 각종 차별과 폭력을 과거의 반유대주의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차별의 대상이나 형태는 더 다양하고 교묘해졌다. 

우리와는 다른 타자들에 대한 배타적, 적대적 행위는 대상을 달리할 뿐 그 속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대동소이하다. 혹시라도 내가,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하는 조바심, 내가 누리는 혜택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잘못된 현실은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라는 책임전가의 심리이다. 이런 면에서 시대가 바뀌어도 도무지 달라지지 않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본 장 아메리의 혜안이나 그런 세계 앞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자유죽음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아메리의 시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생물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들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아메리가 하고자 했던 말,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끝내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고 온몸으로 기억하려던 그의 태도나 주장은 여전히 현재성을 지닌다. 

그가 이 책에서 피력했던 것처럼, 모든 형태의 부당한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역사적 실체를 밝혀내며, 잊지 않기를 다짐하는 것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다음 세대에게 주어진 역할이자 소명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재출간을 환영한다. 

 

 

 

안미현
국립목포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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